5300여 점 지난해 대부분 훼손
"그날 이후 귀가 잘 안 들리더라
혼자서 복구 중…어려움 많아"
평생 그림 단 한 점도 안 팔아
미술관·작품 사회 기증 계획

진주시 내동면에는 노화가가 운영하는 미술관이 있다. 지난 1998년 개관한 박덕규미술관이다. 경남지역 초등학교에서 미술 교사, 교감, 교장을 지낸 박덕규(87) 관장이 폐교된 옛 내동초등학교에 조성한 개인미술관이다. 사재를 탈탈 털어 미술관을 만든 박 관장은 교직에 몸담던 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자신의 작품을 단 한 점도 남에게 팔지 않고 있다. 선사시대 토기를 주제로 그림을 그려온 박 관장은 그간 작업했던 그림이란 그림은 모두 미술관에 두고 있다. 작품 수량은 5300여 점에 이른다. 박 관장은 "그림은 자기 자신이기도 하면서 자식이기도 하다. 자식을 팔아먹는 부모가 어디 있나"라며 "내 그림과 예술은 항상 미완성이다. 남에게 완성되지 않은 작품을 줄 수 없다. 그래서 한 점도 판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팔지 않을 거다"라고 말했다. 그를 지난 1일 오전 10시 박덕규미술관에 있는 화실에서 만났다.

박 관장은 한평생 미술인의 길을 걷고 있는 원로작가다. 그 역사는 온 가족이 일본으로 떠난 1940년 출발한다. 6살 때 일본에서 유학하던 형을 따라 교토로 갔다.

2녀 6남 중 여섯째인 그는 큰형이 "그림에 소질이 있는 것 같다"며 사준 도화지와 크레용에 혼자 그림을 그리다가 초등학교 재학 당시 일본인 미술 교사 눈에 들었다. 조선인을 학대하고 차별하던 시기였지만, 그의 재능을 알아본 화가 출신 교사 야마모토는 방과후 박 관장을 따로 불러 그림을 가르쳤다. "소질이 있다"며 차별하지 않고 일본 학생들과 똑같이 미술 기법을 알려줬다고 한다.

▲ 박덕규미술관 박덕규 관장이 화실 안 작품을 둘러보고 있다. 박덕규미술관은 1998년 폐교된 진주 내동면 삼계리 내동초등학교를 박덕규 화가가 작업실 겸 미술관으로 고친 곳이다.  그가 평생 그린 작품 5300여 점도 여기에 있다. /최석환 기자
▲ 박덕규미술관 박덕규 관장이 화실 안 작품을 둘러보고 있다. 박덕규미술관은 1998년 폐교된 진주 내동면 삼계리 내동초등학교를 박덕규 화가가 작업실 겸 미술관으로 고친 곳이다. 그가 평생 그린 작품 5300여 점도 여기에 있다. /최석환 기자

"그림을 그리게 된 건 큰 형님의 칭찬과 일본에서 초등학교에 다닐 때 만났던 은사님의 덕이 컸다. 나의 인생을 완전히 뒤바꿔준 분이 야마모토 선생님이었다. 나를 화가로 만들어준 분이시다. 그분이 아니었다면 난 화가가 되지 못했을 거다."

박 관장은 해방 이후인 지난 1949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일본에서 죽을 수 없다며 죽더라도 한국에 가서 죽고 싶다는 어머니 뜻이 반영된 결과였다. 귀국한 뒤로 그림을 제대로 손에 잡을 순 없었다. 이듬해 6·25전쟁이 터졌다. 전쟁이 끝난 뒤부터 그림을 본격적으로 그릴 수 있었다. 풍경화와 인물화, 정물화 등 가리지 않고 그렸다. 완성된 작품 모퉁이엔 처음 그림을 그린 날짜와 마친 날짜를 적었는데, 이달의 몇 번째 작품인지도 그 옆에 같이 기재했다. 4월에 5번째로 만든 그림이 있다면 '4-5'라고 써놓는 식이었다. 그래서 그의 모든 작품 모퉁이엔 크고 작은 크기로 숫자들이 적혀 있다.

어려서부터 그림을 좋아하던 그였지만, 전업 화가의 길을 가게 된 건 교직에서 퇴임한 뒤부터였다. 애당초 꿈은 따로 있었다. 교사였다. 진주사범학교를 다녔고, 졸업 이후 교직에 발을 내디뎠다. 1957년 진주 배영초등학교 미술 교사로 첫 발령을 받았다. 이후 진주교대부속초등학교, 평거초등학교, 수정초등학교, 금성초등학교, 금산초등학교 등을 거쳤다. 그의 마지막 학교였던 망경초등학교에서 교장으로 5년간 있었다. 이 학교를 끝으로 1998년 정년 퇴임했다.

"5월 15일 스승의 날이 되면 서울, 부산, 마산 사방에서 전화가 온다. 잊지 않고 전화를 해주니까 교사 하길 참 잘했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제자 가운데선 체육인도, 무용인도, 과학자도, 신문기자도, 장관도 나올 수 있다. 제자들이 훌륭하게 자라면 보람을 많이 느낀다."

▲ 박덕규 미술관장. /최석환 기자
▲ 박덕규 미술관장. /최석환 기자

1998년 교직에서 물러난 박 관장은 그해 폐교가 된 진주 내동면 삼계리 내동초등학교를 작업실 겸 미술관으로 개조했다. 퇴임 이후 올해로 20여 년째 운영 중이다. 개인 화실도 이곳에 있고, 평생 그가 그려온 작품 5300여 점도 여기에 모여 있다.

미술관 운영하면서 최악의 상황을 마주한 적도 있었다. 지난해 8월 침수 피해를 겪었다. 미술관 내부가 물로 가득 찼다. 박 관장이 평생 빚어온 작품들이 물에 잠겼다. 온통 흙범벅이 됐다. 유물 전시관 진열장, 미술전집, 냉장고 등이 침수·파손되기도 했다. 그의 차도 침수돼 폐차했다. 이때 겪은 피해를 아직 복구하지 못했다. 비용 문제가 컸다. 박 관장은 8개월 넘게 미술관 운영을 하지 못하고 있다.

"공든 탑이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작품을 팔라고 하는 사람이 많았어도 절대 판매하지 않았었는데…. 돈으로 환산이 안 되는 피해다. 침수 때문에 작품 70~80%가 상했다. 이때를 생각하면 너무 마음이 아프다. 이후로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 내가 2남 1녀를 두고 있는데, 애들이 미술관에 와서 눈물을 흘리고 가기도 했다. 남강댐 수문을 확 열어버리니까 피해가 컸다. 비용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실정이다. 언제쯤 완전히 복구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혼자서 복구하고 있다.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다."

박 관장은 복구를 완료한 뒤 추후 미술관을 사회에 기증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다만 이를 위해선 3~4가지 조건이 있다고 했다. 기증받은 작품을 팔지 않아야 한다는 점, 박덕규미술관을 영원히 존속시켜야 한다는 점, 7~8명으로 구성된 이사진을 꾸려 미술관을 운영해야 한다는 점 등이다. 그는 이와 관련한 기증 계획 수립과 함께 미술관 복구 작업을 계속해나갈 방침이다. 작품 활동도 병행한다.

"진주는 예술·문화·교육도시라고 하면서도 상설전시관이 하나도 없을 때가 있었다. 나는 1980년대 교장이 된 뒤부터 외부에서 오는 누구든 그림을 무료로 볼 수 있는 미술관,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마음껏 그림을 볼 수 있는 미술관을 만들어야겠다는 꿈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이 미술관을 혼자서 만들게 된 거다. 미술관은 죽기 전에 돈 한 푼 받지 않고 다 기증할 거다. 조건은 3~4가지뿐이다. 나는 그림을 팔겠다는 생각을 아예 해본 적이 없고, 팔지 않은 걸 정말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돈이 없어서 어렵다고 느낄 때도 있었지만, 지금껏 만든 작품이 여기에 남아있다. 작가의 붓은 마르면 안 된다. 앞으로도 계속 그림을 그릴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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