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피란민 몰린 장승포
17만여 포로 가둔 고현 수용소
고려 의종 애사 서린 둔덕기성
어우러짐 용납 않던 시대 흔적

거제는 참 많다. 섬이니 먹을거리 많은 거야 당연하고, '파도가 섬의 옆구리를 자꾸 때려친 흔적이 / 절벽으로 남았는데 / 그것을 절경이라(복효근 '섬')'하니 볼거리 또한 많고, 섬에 흘러든 시절엔 사연 없는 시절이 없을 터이니 이야기 또한 많다. 다 먹고 다 보고 다 들으려면 '한 달살이'로도 부족할 듯싶다. 하루를 한 달같이 보내겠다는 불성설엔 미련을 두지 않는다. 하루를 하루답게!

장승포와 둔덕기성을 돌아 포로수용소가 나의 여정이다. 봄 도다리와 해풍에 자란 쑥을 넣어 한 소끔 끓여낸 도다리쑥국이야말로 거제의 맛이라던가.

▲ 거제 장승포항 전경. 한국전쟁 당시 피란민 1만 4000여 명이 탄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흥남에서 출발해 1950년 12월 25일 장승포항에 도착했다.  /경남도민일보 DB
▲ 거제 장승포항 전경. 한국전쟁 당시 피란민 1만 4000여 명이 탄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흥남에서 출발해 1950년 12월 25일 장승포항에 도착했다. /경남도민일보 DB

◇장승포항, 기적의 바다 = 장승포를 찾은 까닭은 1950년 12월 25일의 바다 때문이다. 1950년 12월 23일 흥남을 출발한 메러디스 빅토리호에는 피란민 1만 4000여 명이 탔다. 남으로 가고자 한 사람들과 북에 남은 사람들은 한 가족이었다. 영영 이별을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 터이고, 소나기는 피하고 보자는 심정이었지 않았을까. 배는 크고 장승포의 바다는 낮았다. 피란민은 LST(상륙함)에 옮겨 타고 낯선 땅에 내렸고, 환대받지 못했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에'로 시작하는 노래는 내 부모님 세대의 어린 시절 노래일 터인데도 내게까지 익다. 보편 정서인 이별과 만남 이야기에도 흥남철수 이야기에는 틀이 있다. 이념 전쟁에서는 이별과 만남조차 인간적인 이야기에만 머물게 하지 않는다. 쓴 사람의 의도와 무관하게 말해지고 읽는 사람의 의지와 무관하게 들리게 된다.

"윤시정이라는 소녀가 '봉선화'의 독창을 부른 것이 여러 사람의 눈에 눈물을 자아내게 하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듣는 사람의 가슴속에 충격을 주고 사무치는 것을 주고 눈물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었고, 그로 인하여 세 사람의 일은 더욱 크고 빠른 성과를 거둘 수 있게 되었다."

김동리 소설 <흥남철수>이다. 철수 전 흥남에서의 이별과 로맨스가 소설에 있다. 전쟁이 배경이니 '나쁜 놈'과 '착한 놈'으로 편이 나뉜다. 민족의 비극에 첨예하지 않은 로맨스는 '이상한 놈'으로 읽혀 비평가들이 매운 날을 세웠다.

피란민은 이주민이었고, 장승포에는 선주민이 있었다. 선주민과 이주민의 조우에는 경계가 있기 마련이다. 더구나 선주민의 곳간이라 해서 넉넉한 게 아니었던 때이니 인심을 바라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피란민들은 뭍으로 옮겨 간다. 거제로 온 까닭은 하나였지만 거제를 떠난 까닭은 제각각이었을 터이다.

장승포에는 '기적의 길'이 있다. 흥남에서 시작된 '기적의 길'은 장승포가 종착지였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이 시작된다'는 말은 소설 작법에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다. 이주민과 선주민이 한 주민으로 어우러지려면 한 소끔 끓어오를 시간이 필요했을 터이다. 전쟁이란 시간은 한 소끔의 시간을 용납하지 않았다.

▲ 둔덕기성 전경.  /경남도민일보 DB
▲ 둔덕기성 전경. /경남도민일보 DB

◇둔덕기성, 폐왕(廢王) 별희(別姬) = 고려 의종은 무신정변으로 쫓겨나 거제에 유폐됐다. 측은하나 선량한 왕은 아니었다. 스무 살에 왕위에 올라 술과 여자에 빠져 방탕했다니 백성 입장에서는 '그놈'에서 '그놈'으로 자리바꿈하는 정도이지 않았을까. 견내량이 내려다보이는 산에 성을 쌓고 우물을 파고 3년을 버텼다. 3년을 버텼으니 더 버틸 수도 있었을 터인데, 떠났다. 복위를 꿈꾸었으나 경주에서 이의민에게 허리가 꺾여 죽었다 한다.

폐왕이 된 의종 이야기만 있었다면 산성에 오르지 않았을 것이다. 이야기는 정사(正史)보다 야사(野史)에 마음이 더 끌리는 법니다. 왕의 성정을 아는 신하들이 마을에서 가장 예쁜 처녀에게 붉은 비단 옷을 지어 입혀 왕 곁에 데려다 앉혔다. 처녀는 왕에게 연민을 느꼈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왕이 처녀에게 마음이 없다고 여긴 신하들은 마을로 처녀를 돌려보냈다. 마을로 돌아온 처녀는 바다에 뛰어들었다고도 하고 호랑이가 되었다고도 하는 뒷이야기는 설화답다. 훗날 폐왕의 연애시가 발견됐다.

 

'내게는 오랜 습벽이 있어 늘 상심했다

이제 마음이 끊어졌으니

폐왕의 습벽은 무위하고 평화롭다

그러나 세상에는 아직 이리 붉은색이 있으니

그대 무의미하고 경이롭다'

 

이주민인 의종과 선주민인 붉은 비단옷의 처녀는 한 소끔 끓지 못했다. 한 소끔 끓어 어우러졌으면 어땠을까? 의종은 허리가 꺾이지 않아도 되고, 그녀는 바다에 뛰어들거나 호랑이가 되지 않았을는지도 모른다. 한 소끔 끓어 어우러졌다면 그들은 거제에서 맛나는 생애를 이어갔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 이야기는 <우리는 거제도로 갔다>라는 책에서 읽었다. 이야기의 원출처를 확인하고 싶었으나 못 했다. 출처 확인이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굼뜬 사람을 움직였으니 좋은 이야기이다.)

▲ 포로수용소에 있는 김백일 장군 동상(왼쪽)과 친일행적단죄비.  /이헌수 시민기자
▲ 포로수용소에 있는 김백일 장군 동상(왼쪽)과 친일행적단죄비. /이헌수 시민기자

◇거제포로수용소, 아직도 경계근무 중 = 장승포에 피란민이 닿던 즈음 고현에는 부산에서 포로들이 왔다. 그들은 고현 해안에서부터 천막을 세웠다. 천막은 곧 계룡산과 국사봉 사이 계곡과 들판을 빼곡하게 채웠다. 1951년 6월에 17만 명을 넘어섰다. 선주민에 이주민이 더해졌다. 10만여 명에 이르렀다는 피란민과 17만여 명의 포로까지. 이 이야기가 글에 담길 수 있기는 한가.

 

"그것은 본 사람만이 아는 일이지요.

누가 거제도 제61수용소에서 단기 4283년 3월 16일 오전 5시에 바로 철망 하나 둘 셋 네 겹을 격(隔)하고 불 일어나듯이 솟아나는 제62적색수용소로 돌을 던지고 돌을 받으며 뛰어 들어갔는가"

-김수영 '조국으로 돌아오신 상병 포로 동지들에게' 중에서

 

포로수용소의 이야기를 담은 글은 이념 편향을 증명해야 하는 당대의 사회 방언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자유의 시인이라는 김수영에게서도, 김소진의 소설 <쥐잡기>, 최인훈의 <광장>, 권정생의 <초가집이 있던 마을>에서도 그러하다.

 

"전쟁터에서 포로가 될 때도 생사의 갈림길에서 선택한 것이 살기 위해 두 손을 번쩍 드는 것이었다. 지금 이 자리는 또 다른 생사의 갈림길이었기 때문이었다……도대체 어떻게 하면 죽지 않을 수 있는지 그걸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 가슴을 옥죄었던 것이다."

-권정생 '우리들의 하느님' 중에서

 

포로들이 고현에 내렸을 때 선주민인 거제 사람들은 어땠을까? 자기네들의 삶의 터전에서 어찌 되었을까?

 

"친척집에 가서 살았지.", "보상이 뭐야. 전쟁통인데 어쩔 수 없는 거지.", "3년 만에 돌아왔는데 풀이 사람 키만하게 자라 있었어. 황무지로 변해 있었지. 원래 저쪽이 우리 집이었는데 이쪽에서 살라고 해서 여기로 왔지. 그때 고생은 말로 못하지."

-주중연 '선생님과 함께 떠나는 문학 답사' 중에서

 

쫓겨났겠지. 그저 감내하는 수밖에 없었겠지.

포로수용소에 들자 군가가 먼저 들렸다. 주차장 오른쪽에는 메러디스 빅토리호 모양의 흥남철수작전기념비가 있다. 그 앞으로 김백일의 동상이 있다. '영원히 추모하겠다'며 함경남북도민이 세운 동상이다. 흥남철수작전 때 피란민을 수송선에 탈 수 있도록 도와준 것에 대한 고마움이다. 그 옆에는 '김백일친일행적단죄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간도특설대 출신으로 항일무장독립세력과 무고한 민중을 학살하는 데 앞장선 김백일의 죄상을 밝히고 있다. 경계만 짓고는 한 소끔 끓지 못하는 역사가 여기에도 서 있고, 군가는 여전히 울리고 있다.

도다리쑥국을 못 먹었다. 하마 철이 지나 해풍 쑥이 없다고. 도다리쑥국을 먹으려면 한 소끔 끓어오르는 시간도 필요하거니와 때를 잘 맞춰야 했다. 때와 시간이 필요한 게 어디 도다리쑥국뿐이랴.

 

※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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