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폭 피해 증명했던 투쟁사 재구성
인권운동 과정·가족 이야기도 생생
"평화 지키려는 마음이 핵 이겨내"
오월과 작별인사할 때쯤 떠오르는 사람 김형률.
'핵 없는 세상을 일구기 위해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이 말은 고 김형률(1970.7.28~2005.5.29) 묘비에 새겨져 있는 문구다.
서른다섯 일찍 떠났지만, 누구보다 삶에 대한 애착은 남달랐던 흔적이 김옥숙 소설가 손으로 태어났다. 책 <김형률>에는 반핵인권운동가, 원폭 피해자 2세 김형률의 삶이 고스란히 담겼다.
"합천에 원폭 기념관이 생겼으면 좋겠다." 생전에 그가 일기에 썼던 말이다. 왜 합천인지는 숫자와 역사가 말한다. 2019년 보건복지부 조사에 따르면 1945년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 폭탄에 노출되어 피해를 입은 한국인 피해자가 7만 명이다. 이 중에서 4만 명이 당시 피폭으로 사망하고, 생존자 중 2만 3000명이 귀국한 것으로 추정한다.
피해 생존자 중 합천 사람이 많았다. 일제강점기 히로시마로 간 이들은 대부분 강제 노역을 당하거나 먹고살 일자리를 찾아 스스로 고향 땅을 떠난 경우였다.
김형률의 어머니는 여섯 살 나이에 히로시마에서 원폭 피해를 입었다. 그는 자신이 왜 그리 몸이 약한지 병이 무엇인지 찾고 또 찾았다. 그리고 피폭 후유증이 유전된다는 사실을 알렸다. 2002년 기자회견은 한국 사회에 충격을 줬다. 해방 이후 60년 동안 묻혀있던 일을 그는 온몸으로 증명했다.
"드러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원폭 후유증으로 아픈 것은 창피하고 부끄러운 일이 절대 아닙니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원폭 2세 환우들의 삶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키 162㎝, 몸무게 36㎏, 폐의 기능이 30%밖에 남지 않은 형률에게 포기란 없었다. 원폭 2세 환우를 찾아 전국을 돌아다녔다.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조사도 되지 않은 현실을 비판하면서 연대할 이들을 찾고 끈질기게 설득했다. 그 길에 든든한 지지자인 아버지가 늘 함께했다.
"아버지는 지하철 계단도 숨이 가빠 제대로 오르내리지 못하는 아들을 업고 어디라도 오르내렸습니다. 아버지는 원폭 관련 자료가 잔뜩 들어 있는 무거운 배낭까지 메고……(중략) 아버지의 등은 아들이 흘린 눈물과 비 오듯 흘린 아버지의 땀으로 금세 축축해졌습니다."
그런 아버지는 형률의 뜻을 이어서 핵무기의 무서움을 세상에 알리고 원폭 피해 2세 환우들의 인권 운동에 헌신했다.
김형률의 활동은 기록이 되었고, 국가인권위에서 원폭 피해자와 2세에 대한 실태조사가 시작됐다. 2016년 '한국인 원자폭탄 피해자 지원을 위한 특별법'이 만들어진 계기도 그의 인권회복 운동에서 왔다.
'붉은 꽃처럼 뚝 떨어져 버린 반핵인권 운동가 김형률'. 2017년 부산민주공원에 있던 그의 납골함은 합천 묘역으로 옮겨졌다. 아버지의 뜻이었고, 2019년 합천서 처음 추모제가 열렸다.
작가 김옥숙도 합천이 고향이다. 김 작가는 평화가 저절로 찾아오지 않는다고 말한다. "핵을 이겨 낼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생명에 대한 사랑, 평화를 지키려는 고귀한 마음입니다. 평화는 저절로 오지 않습니다. 그 누구도 대신 지켜 주지 않습니다."
누구보다 삶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던 사람. 그리운 모습을 마음에 그린다. 152쪽. 1만 3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