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림면∼낙동강 박진나루 입지
창녕·합천·고령 향한 문화경로
백제·신라·왜와 교류 흔적 가득
비지정문화재로 벌초 관리뿐
안내판도 없이 봉분 유실 방치

의령군 부림면에서 낙동강 변 박진나루로 가는 고개를 넘어가기 전에 만나게 되는 경산리 저수지 '경산지' 주변에는 가야시대 어느 세력이 터를 잡고 살았을까.

비가 오락가락 내리던 지난 16일 오후 박진고개 근처에 다다랐을 무렵 마주하게 된 생각이다. 고개를 넘어가려면 거쳐야 하는 지방도 1008호 직선 구간에는 6세기께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의령 경산리고분군이 있다. 이곳에서 저수지가 보이는 경사진 도로 옆을 보면 굴착기로 흙을 퍼 한쪽에 인위적으로 쌓아 놓은 것 같은 커다란 무덤 하나가 우뚝 솟아 있다. 직경은 24m, 높이는 6m 남짓. 무성하게 자란 잡초로 뒤덮인 채로 도로 옆에 쌓여 있다.

그 맞은편 농경지에는 같은 느낌 다른 크기의 중형급 고분이 하나 더 있다. 직경 15m, 높이 3.5m로 쌓아 올려진 흙이 적은 상태로 남아 있어서 규모가 큰 건 아니다. 멀리서 보면 고분처럼 보이지 않는다. 도로를 만드는 과정에서 사평(모래로 된 평평한 땅)된 고분이 주변에 여럿 있다. 이곳 주변으로 고분 수백 기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볼수록 이상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보더라도 고분군으로 볼 법한데 설명판이 앞에 없다.

▲ 의령 경산리고분군 유적 원경. 고분군 입지가 낙동강으로 향하는 교역로 중심에 있었음을 한눈에 유추할 수 있다. /극동문화재연구원
▲ 의령 경산리고분군 유적 원경. 고분군 입지가 낙동강으로 향하는 교역로 중심에 있었음을 한눈에 유추할 수 있다. /극동문화재연구원

경산리고분군은 부림면 경산리 일원에 있는 가야시대 고분군이다. 1977년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에서 발간한 <문화유적총람>을 통해 관련 고분군이 "봉토분으로 5기가 경산리에 있으나 유물이 모두 도굴됐다"고 처음 기록됐다. 실체가 불분명한 상태로 오랜 기간 남아있다가, 1994년 경상대학교박물관에서 진행한 '의령군의 선사·가야유적에 대한 지표조사' 과정에서 대형 봉토를 갖춘 고분 9기가 가야고분군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2000년 박진고개∼율산 도로 확·포장공사에 따라 경상대학교박물관이 시행한 발굴조사 당시 대형 봉토를 갖춘 경산리고분군 1호분, 석곽묘 51기와 고려∼조선시대 무덤 10기 등 유구 61기, 대가야·아라가야·소가야 등의 가야 양식 토기, 신라 후기 양식의 토기류 223점, 왕릉에서만 나오는 것으로 알려졌던 청동그릇(동완) 1점, 말갖춤, 큰 칼(대도), 창(투급창) 등 금속기 139점 등이 조사됐다. 2016년 발굴조사 때 2호분에서는 원통모양그릇받침과 목 짧은 항아리 등 토기류 5점이 나왔다. 의령에 있던 가야 세력이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백제·신라·왜 등 주변 여러 나라와 교류해왔다는 사실이 발굴 조사된 유구와 유물을 통해 확인된 셈이다. 다양한 형식의 유물이 출토된 점을 미뤄 볼 때 경산리고분군은 교역을 중심으로 성장한 의령 동부지역 세력의 중심묘역이라는 게 학자들의 평가다.

발굴조사 당시 조사 구간에 포함되지 않은 여러 고분 중 고분군의 남쪽을 통과하는 도로 남측 절개지 근처에 있는 고분은 아무런 보호와 관리를 받지 못한 채 유실돼 가는 상태였다.

▲ 의령 경산리고분군에서 발굴된 토기. /경상국립대 박물관
▲ 의령 경산리고분군에서 발굴된 토기. /경상국립대 박물관
▲ 의령 경산리고분군 1호분 발굴 당시 모습. /경상국립대 박물관
▲ 의령 경산리고분군 1호분 발굴 당시 모습. /경상국립대 박물관

의령군은 2016년 기록 보존과 향후 보존관리에 필요한 기초자료를 확보하고자 문화재청에 긴급발굴조사를 위한 국고보조금을 신청해 그간 조사된 적 없던 경산리고분군에 대한 발굴조사를 진행했다. 그해 11월 1일부터 12월 23일까지 봉분과 매장주체부에 대한 정밀발굴조사를 벌이면서, 매장주체시설인 석실이 추가 붕괴하지 않도록 내부에 모래주머니와 가늘고 고운 흙을 채워 넣었다. 외부에는 봉분 형태를 유지하고자 고운 흙을 쌓고 잔디를 심었다.

경산리고분군 주변에는 지금까지 확인된 것 말고도 수백 기에 달하는 고분이 더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발굴 조사되지 않은 유적을 추가 조사할 필요는 있겠지만, 이를 진행하더라도 지금까지 확인된 연구결과보다 더 중요한 자료가 경산리에서 나오지는 않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평가한다. 현재 경산리고분군은 비지정문화재 현상유지 차원에서 문화재돌봄사업 참여 기관이 1년에 한두 차례씩 벌초를 하며 관리 중이다.

장상갑 의병박물관 학예연구사는 "가야 문화를 연구할 때 중요하게 보는 것이 지역 간 교류 현황과 출토 유물"이라며 "경산리고분군은 유물을 통해 주변 지역과 관계 속에서 다양하게 교류해온 흔적이 확인된 유적"이라고 밝혔다. 이어 "박진고개를 넘어 낙동강을 통해 창녕과 합천, 고령까지 갈 수 있는, 문화가 흐르는 경로에 경산리 고분군이 있다"며 "당시 큰 세력이 이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 의령 경산리고분군 2호분이 표지판도 없이 제대로 관리 받지 못한 채 방치돼 있다. /최석환 기자
▲ 의령 경산리고분군 2호분이 표지판도 없이 제대로 관리 받지 못한 채 방치돼 있다. /최석환 기자

김상철 의병박물관 관장은 "경산리유적은 문화재로 지정된 상태는 아니지만, 문화재 지정 절차를 밟아 등록문화재로 지정해도 될 만큼 가치가 충분한 유적"이라며 "1500년 넘는 세월이 지나면서 사면에 사평이 많이 됐다. 조사되지 않은 고분이 얼마나 더 있을지 수치를 추정하긴 어렵지만 수백 기가 있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의령에 존재했던 가야는 함안 아라가야가 아니었고, 고령의 대가야에 예속된 집단도 아니었다"면서 "지금까지 확인된 의령지역 가야유적 고고학 조사자료를 보면 의령지역에는 의령읍 중리고분군, 중동리고분군을 중심으로 하는 서남부 집단과 부림면 경산리고분군, 유곡리고분군을 중심으로 하는 동북부 집단 등 두 개의 정치집단이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김 관장은 "옛 세력들이 뚜렷한 지역색을 띤 강력한 정치집단까지 성장하지는 못했지만, 어느 한 주변의 강대 세력에 예속하거나 복속되지 않고 그들 나름의 세력을 유지했다"며 "하나의 분묘 내에서 유물이 다양하게 나오는 것이 이를 특징적으로 잘 말해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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