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느린학습자협의체... 부모모임서 현재 24개 단체 참여
맞춤형 교육·심리상담 등 지원, 경계선지능인 조례 제정 성과도
"경남 '학교 내 대안교실' 활용해 의미 있는 성과 낼 수 있을 것"

세상에는 편의에 따라 그어진 수많은 '금'이 있습니다. 크게는 사상·인종·국가, 작게는 인간관계에 이르기까지 씨줄과 날줄처럼 어지러이 얽혔습니다. 금이 만든 경계선은 양쪽을 손쉽게 나눌 수 있을 듯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흰색과 검은색 사이 회색이 있는 것처럼, 모든 금 언저리에는 어디에도 섞이지 못하고 부유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적장애와 평균지능 경계에서 방황하는 '경계선지적기능인'도 그렇습니다. 오랜 시간 부대껴 왔음에도, 우리는 이들을 잘 모릅니다. 경남도민일보와 초록우산어린이재단은 4회에 걸쳐 이들이 살아가는 자리를 돌아봅니다.

◇부모 모임에서 조례 제정까지

서울은 전국에서 경계선지능인을 보듬는 사회적 체계가 비교적 촘촘한 곳이다. 그 중심에는 '느린학습자 의제실천 네트워크'(이하 느린학습자 협의체)가 있다.

경계선지능인 지지 체계가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은, 사회적 무관심 속에 마냥 아이를 내버려둘 수 없었던 부모들 고민에서 시작됐다. 현행 교육제도에 섞이지 못하는 아이에게 맞춤 교육을 진행하고, 고민과 정보를 공유하는 모임이 생긴 까닭이다. 오미정 느린학습자시민회 이사장은 2015년부터 성북구 부모 자조모임을 꾸려 오다가, 그 영역을 사회적으로 확장할 기회를 맞았다. 2017년 서울시동북권NPO지원센터와 함께 경계선지능인 사회적 지지 체계를 고민하는 실무단(느린학습자 워킹그룹)을 꾸린 것이다.

실무단은 부모·일선 교육자를 대상으로 언어능력·사회성을 향상시키는 맞춤 지도법을 교육하는 한편, 연구자들과 협업으로 '경계선지능인이 겪는 생애주기별 어려움', '병영생활에서 겪는 어려움' 등 사례 연구를 축적하기도 했다. 이는 경계선지능 문제의 사회적 공론화에 큰 도움이 됐다.

이 같은 활동에 정치권도 관심을 기울였다. 지난해 '서울특별시 경계선지능인 평생교육 지원 조례안'이 전국 최초로 통과됐다. 이 조례는 △시장의 책무 △경계선지능인 평생교육 지원계획 수립 △평생교육 지원센터 설립 근거 등을 규정한다. 그동안 초·중등교육법에서 '학습부진아' 차원에서만 다뤄졌던 경계선지능인 관련 논의의 범주를 학교 밖으로 꺼낸 의미 있는 전진이다. 현재 서울시는 시행령 마련을 위해 연구 중이다.

◇넓어지는 '기댈 곳'

경계선지능인·부모·일선 교육자가 기댈 수 있는 지지 체계도 단단해지고 있다. 느린학습자 협의체는 2017년 부모 자조모임 '소나기', 성북교육복지센터, 시민모임즐거운교육상상, 성북작은도서관네트워크 등 성북구 중심으로 출발했지만, 해를 거듭하며 외연을 확장했다. 이 과정에서 협의체 참여 기관은 부모모임·시민단체·대안학교·교육복지센터·청소년상담복지센터·마을교육공동체·협동조합·사회복지관 등 24개 단체로 늘었다. 자연히 활동 범위도 동북권·서남권·경기남부권·경기북부권까지 뻗어나갔다.

참여 기관은 각 권역에서 △부모 교육 △교사 연수 △심리상담 △문화체험활동 △강사 연계 등 다양한 맞춤 교육 과정을 지원한다. 부모·시설 종사자·일선 교육자 등 누구나 필요한 지원을 받을 수 있다. 송민기 인디학교장은 "다른 지역 학부모도 부모 교육에 많이 참가한다"며 "사는 지역에 달리 기댈 곳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지난해에는 경계선지능인 권익옹호단체 느린학습자 시민회도 출범했다. 시민회는 성북구 '느린학습자 마을배움터'를 운영하는 한편, 제도 개선·정책 연구사업 등 협의체 활동의 중심축 역할을 한다. 지금은 서울시 시민참여예산 공모에 선정돼 '느린학습자 자립지원체계 구축 시범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사업 거점 운영기관들은 예산을 토대로 지금까지 맞춤 교육에 더해 지역에 맞는 특화 사업을 고민할 계획이다.

▲ 지난 8일 서울시 성북구 느린학습자 배움터에서 '느린학습자 의제 실천 네트워크 회의'가 열리고 있다. 왼쪽부터 장윤주 강북교육복지센터 지역사회교육전문가, 송민기 인디학교 교장, 곽은정 도봉교육복지센터장, 김연성 성북교육복지센터장, 오미정 느린학습자시민회 이사장.  /이창우 기자
▲ 지난 8일 서울시 성북구 느린학습자 배움터에서 '느린학습자 의제 실천 네트워크 회의'가 열리고 있다. 왼쪽부터 장윤주 강북교육복지센터 지역사회교육전문가, 송민기 인디학교 교장, 곽은정 도봉교육복지센터장, 김연성 성북교육복지센터장, 오미정 느린학습자시민회 이사장. /이창우 기자

◇기존 체계와 상승효과

협의체 참여 기관은 각자 영역에 맞춰 지지 체계 한 축을 이룬다. 이 중 교육복지센터는 협의체 실핏줄 역할을 한다. 전국에서 서울에만 있는 기관으로, 복합적 원인으로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학생들을 지원한다. 타 지역 교육청도 교육복지 우선지원사업을 통해 취약아동이 많은 학교에 지역사회교육전문가를 배치하지만, 그렇지 못한 학교도 있다. 교육복지센터는 그런 학교에서 소외되는 아동까지 지원하고자 별도로 세운 곳이다.

센터는 평소 경계선지능인 개인별 맞춤 교육을 진행할 인력 자원을 확보해 뒀다가, 협의체에서 진행하는 역량교육이 있을 때마다 참여를 독려한다. 이렇게 성장한 전문인력은 다시 각 자치구에서 맞춤 교육 활동을 이어간다. 장윤주 강북교육복지센터 지역사회교육전문가는 "센터는 교육청 예산으로 움직이고, 자치구별로 활동 범위가 묶여 있다"며 "서울시를 아우르는 지지 체계를 활용하기 위해 느린학습자 협의체에 참여하고 있다"고 말했다. 곽은정 도봉교육복지센터장은 "복합적인 부적응 요인이 공론화하면서 경계선지능인을 왜 지원해야 하느냐는 목소리도 잦아드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학교 밖 경계선지능인도 지지 체계 안에 있다. 협의체에 참여한 인디학교, 예하예술학교 등 대안학교는 개인별 학습·소규모 집단 학습, 맞춤형 예술교육 등을 지원한다. 각 자치구 청소년상담복지센터는 학교 밖 청소년 상담·교육부터 검정고시, 직업 취득을 돕는 역할을 맡는데, 경계선지능인을 향한 지원도 강화해 나갈 계획이다. 송민기 교장은 "학교를 그만둔 학교 밖 청소년에게는 10년간 결혼생활을 하다 이혼한 것과 비슷할 정도로 심각한 트라우마가 생긴다"며 "학습과 별개로 협의체를 활용해 심리상담, 정신과 치료를 연계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송 교장은 "경남교육청이 모범사례로 만든 '학교 내 대안교실' 체계가 아직 남아 있다면, 이 틀을 활용해 의미 있는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며 "이 방식은 전국에 퍼졌지만, 대안교실 전담교사를 폐지하는 등 정책 원형이 변하면서 흐지부지됐다"고 말했다.

◇남은 과제

아직 할 일은 많다. 우선 앞으로도 계속해서 지지 체계를 확장할 필요가 있다. 송 교장은 "서울 전역 경계선지능 학령인구를 추산하면 10만 명 안팎인데, 지금껏 만든 지지 체계가 보듬을 수 있는 규모는 수천 명에 불과할 것"이라고 말했다.

오 이사장은 "현재 경계선지능 아이들의 정서적 지원은 확실하게 이루어지고 있고, 학령인구별 맞춤교육 과정도 준비하고 있다"면서도 "교육적 문제로만 접근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짚었다. 그는 "학령기뿐 아니라 어른, 노인이 되는 생애주기 전반에 걸친 접근이 필요하다"며 "잘 교육해 취업까지 연결해야 하고, 장기적으로는 이들의 특성을 이해하는 주민들과 함께 지역사회 일원으로 성장할 수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결국 경계선지능인을 공식적인 복지 체계 안으로 편입하는 방법도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가 지원 정책을 체계적으로 마련하면, 반대급부도 생긴다. 바로 '낙인 효과'다. 하지만 오 이사장은 "정말 필요한 지원이 필요한 사람에게 연계된다면, 부모 대다수는 낙인을 걱정하기보다 자녀 성장을 택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장애나 경계선지능은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많은 특성 중 하나일 뿐인데, 마치 그 사람의 전부인 것처럼 규정하는 사회적 인식이 문제"라며 "경계선지능인 본인도 스스로의 특성을 인식하는 과정에서 성장통을 앓겠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어른으로 컸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송 교장은 "선진국 사회복지 체계에서 더는 낙인 효과를 이야기하지 않는 이유는 이를 핑계삼아 복지 체계가 후퇴하는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라며 "지원 체계를 갖추고 낙인 효과를 최소화하는 방법을 고민하는 게 맞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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