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형 한국산연 복직투쟁위공동의장
한국산연 노동자 부당 해고 맞서
복직 촉구 길고 긴 싸움 이어가

강선영 학교비정규직노조 경남지부장
전남 이어 2011년 단일노조 출범
직접 발로 뛰며 노조 가입 설득
"교육현장만은 평등가치 지켜야"

◇한국산연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 김은형 공동의장 = 민주노총 부위원장, 마산자유무역지역 내 한국산연 해고자 복직 투쟁위원회 공동의장 이런 무거운 이름에 걸맞지 않게 웃음 띤 소녀 같은 얼굴의 그를 만났다. 쓰고 온 모자와 두건은 35도를 오르내리는 여름 날씨에 너무 무거워 보였다. 두 겹의 방어막을 벗자 이내 민머리가 드러났다. 2021년 7월 13일, 한국산연의 두 번째 공장 폐쇄와 본격 해고에 맞서 삭발한 머리는 날마다 새롭게 잘리고 있다. 그들의 길고 외로운 싸움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산연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 김은형 공동의장. /윤은주 시민기자

창원시, 옛 마산지역은 수출자유지역과 한일합섬, 두 이름을 빼고는 기억하기 힘들다. 수많은 여성 노동자들, 가난한 집안을 책임져야 했던 딸들의 희생 위에 가족은 생계를 유지했고 나라는 고도성장을 이룬 시기가 있었다. 김은형은 1970년생, 우리 나이로 52세이다. 뜻밖에 마산여자상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당시의 마산여상에는 김용택, 고승하 등 사회 참여적인 의식을 지닌 좋은 선생님들이 많았고 그 속에서 그들은 마산창원고등학생협의회를 만들어 세상에 자신들의 목소리를 외쳤다. 그들의 연대는 끈끈하고 뜨거웠다.

고교 3학년 초기 무렵 당연히 현장을 선택한 마창고협 친구들과 달리 어려운 가정 형편을 생각해서 공채로 기업체 사무직으로 취업하겠노라 했다. 그때 한 선배가 '네가 가고자 하는 그 자리가 바로 노동자를 착취하는 자본가들에게 부역하는 자리이다'라고 말했다. 가난한 집안의 똑똑한 딸에게 기대를 걸었던 가족의 꿈을 차마 저버릴 수 없어서 엄청난 갈등과 방황을 경험했다. 결국 편지 한 장 써놓고 집을 나와 아주 작은 공장에 취업하여 공동체에 합류하였다. 환풍 시설도 없이 열악한 공장에서 철야를 밥 먹듯 하며 납땜 일을 했던 스무 살 처녀의 삶은 피폐했다. 작업 중 깜박 졸아서 손가락에 화상을 입어도 연고 하나를 살 돈이 없었다. 월급의 3분의 2는 공동체로 들어갔고 쥐꼬리만큼 남은 돈으로는 약 하나 살 형편이 안 됐다. 그 뒤 좀 큰 공장에 취업해 갔는데 신체검사를 통해 폐결핵 판정을 받았다. 열악한 작업환경이 낳은 부작용이었다. 결국 퇴사하고 병을 치료한 90년 11월, 수출자유지역 내 한국산연에 입사하게 됐다. 그곳에서 한국노총 교육선전부장, 문화부장 등을 맡아 노동조합 운동을 했다. 한국노총의 변화가 시급하다 여기던 95년에 한국노총을 탈퇴하고 96년 민주노총에 가입해 노동법 개정 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런 와중에 97년 5월 주주총회에서 노동자들이 철저히 배제된 상태에서 한국산연의 철수와 인도네시아 이전이 결정됐다. 사측에서는 민주노총 탈퇴를 요구하며 공장 폐쇄 등 탄압을 했지만 그들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공장을 점거하고 1년 반 이상 투쟁 끝에 일본에서 주주 총회 결정을 번복했고 그들은 회사를 지켰다. 공장은 재가동됐고 회사는 날로 커져서 사원은 500명까지 늘었고 6년 정도 노사의 관계도 좋았다.

이 황금기에 그는 금속노조 경남지부에 파견 나가서 배달호 열사 투쟁 등을 경남지역 투쟁 현장에서 늘 함께했다. 길바닥을 집으로 삼아 지난한 노동 투쟁을 벌이는 사이 2004년 무렵 면역 저하로 또다시 병을 얻었다. 잠시 휴식 뒤 다시 한국산연지회에 복직한 것이 2006년인데 2007년부터 다시 구조조정이 시작됐다. 6년간의 투쟁 뒤 건강 이상으로 휴직 중 2014년에는 류머티즘 관절염 진단을 받았다. 회사를 잠시 쉬던 2015년에 회사에서 민주노총 조합원 전원 2016년 9월 30일까지 정리해고 대상을 통보했다.

도저히 투쟁 현장으로 돌아갈 형편이 아니었지만 그는 결연히 그곳으로 갔다. 치료를 하여 몸이 낫는다 해도 동지들이 떠난 뒤 돌아가는 일은 의미가 없다 느껴졌기 때문이다. 다시 외로운 싸움의 시작이었다. 그 몸으로 해고자 복직 투쟁위 공동의장을 맡아서 일본까지 원정 투쟁을 갔다. 죽음을 각오하고 갔는데 놀랍게 일본 내 그들의 투쟁을 지원하는 많은 응원군이 있었다.

일본에 막 도착했을 때 일본 시민모임은 그에게 강의를 요청했다. 폐업 반대 투쟁의 과정과 성과, 의미 등을 설명하고 질문도 받는 이 강의에서 한 참가자가 그에게 베트남전에서의 한국군의 행동에 대해 물었다. 그는 사과와 사실 인식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그 진솔함은 일본인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이후 한국산연 투쟁을 지원하는 도쿄와 사이타마현 시민모임은 숙소에서부터 생활용품, 심지어 류머티즘 약까지 지원해 주었다. 그들은 8∼9개월을 산연 노동자들과 함께 투쟁하며 세세하게 동정을 살피고 지지하며 함께 투쟁해 주었다. 그들의 목적은 위로금 교섭이 아니라 철저하게 원직 복직이었다. 일본 사이타마의 산연 본사 앞에서 2시간 연설 후 그 지역의 역 광장에서 2시간, 그리고 수요일에는 도쿄로 가서 2시간의 가두 투쟁을 했다. 목요일에는 가와고에 공장까지 찾아가 투쟁하고 일본 내 각종 단체와 연대투쟁을 하며 새벽 5시에 일어나 밤 12시가 되어서 숙소에 도착하는 강행군을 2016년 10월부터 2017년 6월까지 전개했고 결국 합의를 이뤄냈다.

일본 국내 시민단체들의 노력, 한국내 연대 투쟁 그리고 한국 내 지노위, 중노위의 부당해고 판결에 결국 산연 본사가 항복한 것이다. 이것은 한·일 노동 투쟁의 빛나는 승리요, 누구도 믿지 않았던 원직 복직의 꿈을 이룬 쾌거였다. 페이스북에 일기처럼 올렸던 당시의 투쟁 기록을 담아 그는 <담쟁이의 꿈>이라는 책으로 펴냈고 이를 다시 일본어로 번역하여 CD로 제작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 번의 승리가 해피 엔딩이 아니었다. 회사에서는 2020년 7월 다시금 일방적인 폐업을 공지했다. 단협에 의거하여 올해 1월 20일부로 전원 해고 명령까지 내리며 노동자들을 옥죄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이전에도 지금도 오직 하나, 일하고 싶다는 것, 회사를 돌려 달라는 것이었다. 물론 그들도 알고 있었다. 정말 회사 사정이 어렵고 사업이 안되면 회사가 폐업할 수도 있다는 것을. 하지만 한국산연은 2018년에 천안에서 LG 사업장 한 곳을 인수해 가동 중이고 LG와 합작하여 연구개발 사업도 진행 중이다. 그는 세계 8위의 매출을 자랑하는 회사가 노동자 16명의 일을 못 시켜 문을 닫는 것은 노동조합 혐오이자 무조건적인 배척이라고 생각한다. 회사는 결국 해고라는 극한까지 갔고 해고노동자가 된 그들은 지난 1월 천막 농성을 시작했다. 겨울의 추위를 지나 한여름의 뙤약볕 농성까지 이어지는 길고 지루한 싸움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 일본 활동 당시 김은형 공동의장. /윤은주 시민기자

그 사이에 그는 2021년 2월 8일 민주노총 부위원장이 됐다. 한국산연의 투쟁을 함께한다는 조건으로 이 직을 수락했다. 그래서 지금은 주중에는 시간이 맞을 때 서울 투쟁하는 동지들과, 산연지회의 주요 일정에 따라 창원의 노동 투쟁 현장에 있다. 그리고 일본에서 헌신적으로 그를 돕고 일본 산연에서 항의 시위를 주도하던 약사 구니코 씨는 유방암에 걸려 그를 안타깝게 했다. 구니코 씨의 남편은 일본 산켄전기 본사 앞에서 한국산연 노동자들의 연대투쟁을 하던 중 산켄전기의 허위폭력 신고로 부당하게 구속된 상태이다. 남편을 만나고 수술하고 싶다는 아내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고 구속 상태는 지속되고 있다. 그들의 안타까운 소식에 보석금을 마련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고 있다. 해고 동지들의 돈은 받을 수 없다고 하는 말에 그들은 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더 큰 문제, 류머티즘의 염증 지수가 더 올라서 몸이 언제까지 버텨줄지 위태위태한 상황이고 부모님 또한 건강에 문제가 있다.

문제에 문제가 거듭되는 상황에 지치고 힘든 시간도 많다. 하지만 그러기에 더 치열하게 싸워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자유무역지역 노동 투쟁은 현재도 치열하게 진행 중이다. 민머리에 두 겹의 모자를 쓰고 햇살 따가운 거리로 나서는 그의 등 뒤에서 수천 수만의 잎들을 끌고 벽을 넘는 담쟁이 잎이 하나 돋아나고 있었다.

◇전국학교비정규직노동조합경남지부 강선영 지부장 = 1964년 의령에서 태어난 강선영은 어렵고 힘든 유년기를 보냈다. 여섯 살에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6년의 투병 끝에 그가 초등학교 5학년이 되던 해에 돌아가셨다. 38세의 어머니가 자식 넷을 양육하며 극빈층으로 전락했다. 중학교 졸업 후 고민하다가 결국 섬유회사에 취업했다. 당장은 아니지만 산업체 고등학교에 진학하리라는 소박한 꿈이 있었다. 어린 나이에 엄마를 떠나서 공장 생활을 하던 그는 고향에 다니러 올 때마다 교복 입은 친구들을 보며 말 못하고 숨어 많이 울었다.

▲ 전국학교비정규직노동조합경남지부 강선영 지부장. /윤은주 시민기자

의무 근로 기간 후에도 산업체 학교 진학은 쉽지 않았고 결국 천주교 대구 교구에서 운영하는 야학인 새얼학교에서 공부하여 고등학교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이후 27세에 어머니의 중매로 결혼하여 1남 1녀를 낳고 평범하게 살던 중에 방송대에 진학하며 세상을 다른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 IMF 외환위기가 생기고 가정이 해체된 채 방황하는 가출 청소년들을 보며 그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하면서 주변의 이웃들에 대한 관심을 키웠다.

IMF 외환위기는 그의 가정에도 위기로 닥쳐왔다. 남편이 일자리를 잃고 창원으로 이주하면서 적응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사람들을 사귀고 마트에 취업하면서 안정을 찾아갔다. 하지만 고용불안으로 고민하다가 2005년 무렵 급식노동자로 초등학교에 취업하게 됐다. 학생 수가 2600명이나 되는 큰 학교에서 일하면서 학교의 폐쇄성을 많이 느꼈다. 어떤 학교에서는 노조에 가입하려는 조리원 전원을 해고한 사례도 있었다. 학교도 인권 사각지대라 느껴졌다.

2년 6개월 뒤 조리사 자격을 얻고 고등학교로 옮겼다. 아이들 입에 밥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즐거움으로 힘든 줄 몰랐고 자부심도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비정규직의 어렵고 힘든 삶이었다. 그때 전남에 학교 비정규직 노조가 생긴다는 소식을 들었다. 가뭄에 단비 같았다. 우연히 라디오에서 민주노총의 공공부문 마지막 노조 기획 소식을 접했다. 곧바로 전화를 해서 노조 설립 의지를 밝혔고 결국 전남에 이어 두 번째로 2011년 7월 9일에 학교비정규직 단일노조를 출범시켜 준비위원장에 취임했다. 발대식 후 학교에 출근하니 학교가 발칵 뒤집혔다. 교장 이하 학교 관계자들이 모여 그를 불렀고 그 자리에서 그는 노동 3권이 보장된 노조원으로서의 자격을 당당히 말했고 학교에서도 이를 승인했다.

여성 노동자의 비정규직 노조는 일반 노조에 비해 어려움이 훨씬 크다. 그는 우선 학교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어려움을 들었다. 매일 새벽 2, 3시에 퇴근하여 몇 시간 후 출근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힘들어도 노동조합 가입서가 무더기로 쌓이는 것을 보면 모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다. 1기 황경순 지부장의 리더십아래 영양사, 조리사, 조리실무사를 중심으로 노조를 확장했다. 처음엔 남성 중심의 민주노총 분위기에 거리낌도 있었지만 한 걸음씩 걸으며 한 가지씩 해결해나가고 있다. 1·2·3기 수석 부지부장을 거쳐 4·5기 지부장직을 맡아서 노조 전임으로 파견업무를 하고 있다.

▲ 경남도교육청 산업안전보건위원회에 참여한 전국학교비정규직노조경남지부 조합원들과 박종훈 교육감. /윤은주 시민기자
▲ 경남도교육청 산업안전보건위원회에 참여한 전국학교비정규직노조경남지부 조합원들과 박종훈 교육감. /윤은주 시민기자

학교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직종은 무려 80여 가지, 돌봄 노동자의 종류만 해도 60여 가지나 된다. 소위 비정규직 종합 백화점인 셈이다. 그러다보니 노조 내에서도 직종 간의 이기주의나 충돌도 있다. 학교 내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유령 같은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국민입법 청원을 통해 교육공무직이 법제화되어야 이들 노동자가 제 자리를 찾을 수 있다. 정규직 임금의 80%에 머물던 것을 차츰 격차를 해소하고 위험수당, 근속 수당, 급식비, 정기 상여금 등도 지급하도록 했다. 이들의 외침은 2019년 청와대 앞 100인 삭발식에서 강력히 터져 나와 국민들에게 울림을 주었다.

그는 비정규직 없는 학교, 동일 노동 동일 임금이 보장되는 세상을 위해 오늘도 달리고 있다. 세상이 험하고 어려워도 교육 현장인 학교만은 이런 가치가 지켜져야 하는 것이라 믿는다. 교육의 장소에서 차별과 배타가 정당화된다면 이 세상 어디에서 그런 가치를 찾을 수 있겠는가. "학교 안 모든 것이 교육이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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