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이후 빈곤한 시절
울창하던 전나무·구상나무
불법 도벌·방화 수난 겪어
10만 평에 남은 하얀 고사목
가슴 아픈 생채기지만 장관
이마저도 시간 지나며 소실

지리산 제석봉은 해발 1806m로 지리산에서는 천왕봉, 중봉 다음으로 세 번째 높은 봉우리다. 최고봉인 천왕봉이 동쪽에 중봉을, 서쪽에는 제석봉을 양 옆으로 거느리고 지리산의 위용을 한껏 드러내고 있는 것인데 그 제석봉은 장터목 대피소와 천왕봉 사이 3㎞ 구간의 사이에 있다.

제석봉은 한자로 帝釋峰이라고 쓰며 남쪽 비탈에 향적사(香積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문헌에 전한다. 장터목에서 5분 거리에 있는데 천왕봉의 성모사당에 향화를 받들기 위해 있었던 절이라고 여지승람 진양지에 기록되어 있다. 이 절에는 1489년에 김일손이 묵어갔고 이보다 17년 전에는 김종직이, 이보다 9년 전에는 이륙이라는 분이 묵어갔다고 한다. 문헌에 나오는 그들과 관련된 내용들을 종합해보면 향적사는 지리산 제례를 위해 있었던 절로 지리산에서는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절이었으며 지붕은 너와로 덮여있었고 상주하는 스님이 어느 땐 있었고 또 어느 땐 없기도 했던 것 같다. 제석봉이라는 이름 또한 하늘에 제를 지내며 국가와 백성의 태평성대를 기원했던 것과 무관한 것은 아니었던 듯싶다.

◇남악사 = 이 향적사와 연계되어 내려온 행사인지는 모르겠으나 지금도 구례 화엄사 옆 '남악사(南岳社)'라는 사당에서는 지리산 산신제를 지내고 있다. 국태민안과 풍년을 기원하며 지리산신을 제향했던 국가의 제례공간이었다. 남악사의 '남악'은 나라의 오악(五岳) 중 남쪽에 있는 지리산을 말하며 오악의 제례는 국가적 행사였던 것 같다. 지리산의 산신제는 천왕봉에서 그리고 노고단에서 지내다 이후 노고단 남쪽 현재의 구례군 광의면 온당리에 제단을 세우고 제례를 지냈으나 1908년 제단이 폐쇄되면서 그 흔적마저 사라지고 말았다. 그래서 광복 후 구례 화엄사 일주문 앞에서 제를 올리다 1969년 화엄사 옆 현 위치에 남악사(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36호)를 새로 건립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고사목 군락 = 제석봉은 양지바른 평지와 가까운 곳에 샘터가 있어서 과거에는 야영을 하는 등산객들이 있었다. 제석봉에 가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놀라운 풍경은 고사목 군락이다. 10만여 평의 완만한 비탈에 초록과 대비되는 하얀 고사목들이 즐비하였고 바닥은 풀밭이었다. 그리고 바로 눈앞에 천왕봉 정상이 보였고 고사목 사이로 서쪽의 반야봉과 노고단이 선명하게 보였다. 게다가 운해가 뒤덮으면 주변에 섬처럼 떠있는 크고 작은 봉우리들의 모습이 장관이었으니 야영지로는 최고였던 것이다. 그래서 훼손을 염려한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이곳은 전나무와 구상나무의 고사목 군락지로 그 자체가 귀중한 자연경관이니 고사목 훼손 금지는 물론 야영과 취사를 금하며 등산로 이외의 지역은 출입을 금한다'는 내용의 표지판을 걸었었다.

▲ 지리산 제석봉 고사목 군락지. /경남도민일보 DB
▲ 지리산 제석봉 고사목 군락지. /경남도민일보 DB

하지만 제석봉의 아름다움을 연출한 그 고사목에는 가난했던 우리 근대 역사의 슬픈 사연이 담겨 있다. 우리나라는 1945년 해방, 48년 여순사건, 50년 한국전쟁, 60년 4.19혁명, 61년 5.16군사 쿠데타 등 1965년까지 거의 20년 동안 좌우 대립으로 정치적 상황이 매우 불안했으며 해방 공간과 이후 전쟁으로 인해 경제는 피폐했고 사회적 빈곤으로 굶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권력자들의 부정부패로 나라 자체가 매우 혼란스러웠다.

◇연료난 = 이때의 일반 국민들, 서민들이 가장 힘들었던 것 중 하나는 연료난이었다. 60년대 말까지는 농촌은 물론 도시까지도 연료난이 극심하였다. 그때는 석탄과 전기의 생산량이 너무 적었고 석유 수입도 어려워 기본 에너지원이 국가 기간산업을 유지하기에도 어려운 상황이었으니 일반 국민들의 대부분 에너지원은 나무 연료 하나에 의존하고 있었다. 나무가 없으면 밥도 해먹을 수 없었으며 겨울에도 냉방에서 잘 수밖에 없었던 시절이다. 그런데다 전쟁으로 파괴된 건물을 복구하고 모든 분야에서 건설이 시작되던 시기여서 나무의 수요가 급증하여 일상생활에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던 시절이었다. 사정이 이러다보니 동네 인근의 야산들은 모두 땔감으로 나무가 사라져 민둥산이 되었고 나무를 구하기 위해 점점 더 깊고 높은 산으로 손을 뻗칠 수밖에 없는 시절이었다.

당시 지리산은 일반 주민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깊고 높은 산이어서 풍부한 원시림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전국 산림축적량의 22%를 차지할 정도로 나무가 울창한 산림의 보고였다. 그래서 도벌꾼들은 눈 부릅뜨고 지키고 있는 개인 소유가 아닌 감시가 허술한 국유지인 지리산으로 몰려들었다. 게다가 부패한 당국의 관리책임 공무원이나 정치인들의 비호 하에 대규모의 도벌까지 진행되었다.

◇도벌 = 제석봉의 비극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지리산 몇 골짜기의 나무를 베어내었지만 점점 확대되어 해발 1500m의 연하천, 칠선계곡 막바지 완사면, 해발 1800m의 제석봉 정상, 1700m의 장터목까지 그 도벌의 손길을 벗어날 수 없었다. 베어낸 나무들을 운반하기 위해서 제재를 해야 했는데 스리쿼터 군용차의 엔진을 떼어 내어 거기에 원형 톱날을 걸어 대량 제재를 했다고 한다. 골짜기에는 간이 제재소가 생겨나 나무를 다듬어 반출하였는데 대량 제재로 톱밥이 계곡에 산더미처럼 쌓여 계곡을 메울 정도였다니 천연의 밀림이었던 지리산이 얼마나 수난을 당하였는지 상상이 된다. 이러한 불법 행위를 당국에 고발한다 해도 권력을 가진 자들의 비호로 단속이 이루어질 수 없었으니 속수무책의 무법천지였다. 이 도벌꾼들이 지리산에서 베어내는 나무의 규모는 당시 구례를 통해 나가는 것만 해도 하루에 트럭 250대 분량이었다고 하니 얼마나 대규모의 양이었는지 짐작할 만하다. 벌목으로 인한 돈벌이 또한 엄청나다보니 정부나 국회 등 고위층 권력자들까지 얽혀 있었고 나중에는 국회에서 진상조사단을 파견하게 되었다.

◇방화 = 이렇게 나라에서 본격적으로 조사에 착수하는 방향으로 진전되자 도벌꾼들은 자신의 위법 행위를 덮고 흔적을 지우기 위해 방화를 하게 되었다. 지리산 정상에서 타오르는 10만여 평의 엄청난 불길을 상상하니 지금도 숨이 막힐 지경이다. 제석봉의 고사목군은 이때의 화재로 불타고 남은 전나무와 구상나무들의 흔적이다. 지금은 이 고사목마저 조금씩 사라져 듬성듬성 남아 있다. 화재로 인한 아픈 생채기임에도 불구하고 지리산의 아름다운 경관의 하나로 주목받았던 고사목인데 얼마 지나지 않으면 이마저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오래된 고사목이다 보니 하나둘 태풍이나 눈보라에 쓰러져 점점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불타고 남은 고사목이나마 남아서 한때 지리산 정상의 우거진 숲을 상상하게 해주었는데 이제는 도벌과 화재로 보여준 인간의 욕심을 경고해주던 고사목의 헐벗은 외침마저 들을 수 없게 될 것 같다.

※ 참고 문헌 : <지리산 365일> 최화수 지음, <지리산과 구례 연하반> 문동규·박찬모 편저, 우두성 감수, <김종직의 유두류록 탐구> 류정자 지음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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