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원 경남여의사회장 = 창원시 합성동 미래메디컬 3층, 하사랑신경과 문을 열고 들어서면 흰색 그랜드피아노가 환자를 맞는다. 병원과 피아노,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 오히려 신선하다. 김경원(56) 원장의 흰 가운에 '환자를 느끼는 병원'이라 쓰인 글귀와 붉은 느낌표가 눈길을 끈다. 2002년 지금의 하사랑의원을 개원하면서 환자의 아픔을 함께 느끼자는 취지로 직원들과 함께 패용하고 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딸에게 아버지는 늘 슈바이처 같은 의사가 되었으며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신앙심이 깊고 음악을 즐기며 봉사하는 의사가 되겠다는 꿈이 소녀의 마음속에서 싹텄다.

완월초등학교와 마산제일여중, 성지여고를 거쳐 경상국립대학교 의과대학에서 공부하였다. 매월 성경의 의사이자 선지자인 '누가'의 이름을 딴 누가회 모임을 하면서 의료봉사와 선교하는 삶이라는 목표가 생겼다. 졸업 후 수련의와 전공의를 거친 후 개원 초기인 1999년 무렵 부랑자 시설 등에서 봉사를 시작했다.

 

인도네시아 쓰나미 봉사 계기

2013년부터 동남아 의료활동

농촌·이주여성 등 꾸준히 도와

환자 마음 읽는 의사 되려 노력

봉사의 범위가 외국으로 넓어진 것은 인도네시아에 쓰나미가 밀어닥친 2004년이었다. 갑작스럽게 몰아닥친 거대한 비극에 누구라도 나서야 했다. 경남의사회에서 급하게 의료 봉사자를 모집했고 기꺼이 자원했다. 눈 뜨고 보기 힘든 처참한 현실 앞에서 의사가 되어 누군가의 도움이 된다는 것이 더없이 보람된 일임을 다시 한 번 느꼈다. 그에게 봉사의 길을 가르쳐 준 스승은 지금은 고인이 된 여의사회 김경선 전 회장이다. 여의사회에서 부랑자 보호 카드를 만들어 빈곤층을 보호하고 어려운 아이들과 음악으로 소통하는 모습은 큰 감동으로 다가와서 함께 봉사하던 중 그의 롤모델이 되었다. 이후로 농촌지역 의료봉사도 시작했는데 단순 의료만이 아니라 음악을 통해 마음의 위안을 전하는 일도 함께 하고 있다. 때로는 농촌 지역에서 음악회를 열고 미용 봉사, 집수리 등을 병행할 수 있었던 데는 함께 활동해 온 내과 의사인 남편 이근홍과 교회 선교팀의 조력이 큰 도움이 됐다.

2013년 시작한 필리핀 의료 선교활동은 2017년까지 5년간 지속됐다. 필요 경비를 참가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부담하고 매번 700만∼800만 원어치 약품을 구해서 가는 일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작은 알약 하나로 큰 문제를 해결하는 그들의 간절한 기다림을 생각하면 포기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도 그곳에 세운 교회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를 열심히 돕고 있다. 이후 2019년, 2020년 두 해는 미얀마로 의료 선교 활동을 다녀왔다. 현지 형편을 잘 알기에 민주화운동과 코로나로 어려움을 겪는 미얀마의 상황이 안타깝기만 하다. 지금은 모든 것이 묶여버려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하루속히 다시 그들 곁으로 찾아가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 김경원 경남여의사회장이 2013년부터 이어온 동남아시아 의료 선교활동 중 현지인을 진료하고 처방전을 쓰고 있다.  /윤은주 시민기자
▲ 김경원 경남여의사회장이 2013년부터 이어온 동남아시아 의료 선교활동 중 현지인을 진료하고 처방전을 쓰고 있다. /윤은주 시민기자

그는 해부학 의학박사이며 대한신경학회 정회원이다. 또한 임기 2년 경남여의사회장을 3회 연임 중이고 당연직 경남의사회 부회장도 맡았다. 하지만 여의사회 활동에 관해서는 스스로 한계를 많이 느낀다고 했다. 이미 전체 의사의 30% 정도가 여성이라 경남의사회와 활동이 겹치는 부분이 많다. 그리고 많은 이들의 선망의 대상인 의사이지만 가정 내에서 육아는 온전히 여성의 몫인 경우가 많아서 회원들이 제대로 된 활동을 하기에 여건이 충분하지 않다 여긴다. 하지만 그런 중에도 경남이주민센터에서 이주여성들을 대상으로 건강 상담과 좌담회를 연 일 등은 큰 보람으로 남아있다. 지금도 도움이 필요한 의료빈곤층 환자가 있으면 기꺼이 나서서 도움을 주려고 한다.

그는 의사이면서 환자이다. 임신한 몸으로 무리하게 일해서 척추 협착증을 얻었고 격무로 편두통에 시달리는 때도 있다. 유두종을 앓아 유방 일부를 절제했고 출근길 교통사고를 당해서 목을 다쳐 고생하기도 했다. 하지만 스스로의 고통 속에서 환자의 마음을 읽고 더 좋은 의사가 되고자 애쓸 수 있어서 고통을 하나님의 축복이라 여긴다.

65세 은퇴 후엔 기꺼이 의료 봉사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 그의 느낌표가 저개발국의 가장 낮은 자리에서 어떤 울림을 낳을까.

 

◇박미혜 민변 변호사 = LG전자 창원공장 노동자의 딸로 태어난 법무법인 '믿음'의 대표 변호사 박미혜(43)는 전·월세로 이사를 하도 다녀서 주민등록 초본이 4장이나 된다며 웃었다. 기가 세서 한 살 아래 남동생 기를 막는다는 부당한 말을 듣기도 했던 소녀는 흔한 잡기 하나 잘하는 것이 없었지만 유독 공부에는 재능이 있었다. 계급의 사다리를 올라타려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열심히 공부하는 길이라 믿었다.

경원중학교와 창원여고를 거쳐 고려대학교 사범대학에 입학했는데 고등학교 시절, '왜 똑똑한 여학생은 모두 교사가 되려 하나?' 했던 선생님의 말과 어렸을 적 겪었던 할아버지의 송사가 기억을 맴돌았다. 억울한 일을 안 당하려면 법을 알아야 한다던 이야기를 떠올리고 반수 끝에 연세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시절 노동법 학회활동을 하고, 사법연수원 인권법학회에서 활동하며 동기였던 박주민·이재정 국회의원, 차성안 교수, 조수진 변호사 등과 교류했던 일은 큰 즐거움이었다. 똑똑하면서 바른 생각을 가지고 사회생활도 잘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자극을 많이 받았다.

 

인권 감수성 지닌 변호사 목표

창원서 공익 사건에 적극 참여

4대강 사업·수정산단 반대 투쟁

스쿨미투 등 지역에서 큰 역할

대학 3학년에 사법시험 준비를 시작해서 3년 만인 2003년, 젊은 나이에 합격했다. 기대를 안고 사법연수원 생활을 시작했지만 남성 중심의 조직문화, 위계, 잦은 술자리 등은 적응이 힘들었다. 이후의 인생을 공부에 바치지 않고 인권 감수성을 지닌 법률가가 되는 데 바치리라 결심하고 곧바로 변호사가 되는 길을 택했다. 그는 변호사가 단순히 돈 많이 버는 고소득 전문 직업인이 아니라 인권 감수성을 가지고 깨어 있어야 하는 존재라 생각한다. 자신의 일에서 의미를 찾고 스스로의 일을 하는 과정을 통하여 세상을 바꾼다고 믿는다. 그는 변호사 생활을 시작하면서 곧바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에 가입했다.

사실 그의 평소 생각대로라면 주변의 많은 친구들처럼 공익 변호사 활동을 시작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먹고사는 문제가 발목을 잡았다. 결국 현실적으로 선택한 것이 민변 선배가 있는 서울의 로펌으로 가는 길이었다.

캠퍼스 커플이던 판사 남편과 결혼해서 근사한 법조인 부부로 보였지만 현실적으로는 차도 없이 서울 반지하 방에 세 들어 사는 빚 많은 맞벌이 신혼부부였다. 부산으로 발령받은 남편과 주말부부 생활을 하면서 야근, 주말 근무를 일삼았다. 회사에 뼈를 묻을 각오로 일하다 보니 건강에 이상이 와 생리가 단절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남편과 행복의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결국 고향인 창원으로 돌아오는 길을 택했다. 결과적으로 이 선택은 그의 고향인 창원, 우리 지역으로서는 매우 다행한 선택이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소식지 <민변 뉴스>에서는 박미혜 변호사를 '경남지부의 대찬 리더'라 칭했다. 그의 활동 상황을 들어보면 이 말이 꼭 들어맞는 말이었다.

▲ 박미혜(왼쪽 첫째) 변호사가 지난해 7월 1일 창원용지문화공원에서 열린 <김용균이라는 빛>, <나, 조선소 노동자> 북콘서트 사회를 보고 있다.  /경남도민일보 DB
▲ 박미혜(왼쪽 첫째) 변호사가 지난해 7월 1일 창원용지문화공원에서 열린 <김용균이라는 빛>, <나, 조선소 노동자> 북콘서트 사회를 보고 있다. /경남도민일보 DB

2007년 창원에서 변호사 생활을 시작하면서 환경운동연합 활동을 했는데 이명박 정부의 4대 강 사업이 당시의 가장 큰 투쟁 과제였다. 환경운동가 두 사람이 크레인 농성을 시작했는데 내려오면 바로 구속될 상황이었다. 이에 그가 40m 높이 크레인에 올라가서 접견한 뒤 문제를 해결했던 일은 업계의 전설처럼 남아있다. 그 외 마산수정산단 반대위 투쟁의 승리, 2012년 부마항쟁 피해자 첫 손해배상 소송 수행, 창원출입국외국인사무소 유학생 폭행 사건 소송, 스쿨미투사건 조력 등 그가 참여한 공익적 성격의 굵직한 소송들은 모두 경남 법조계에 큰 족적을 남겼다. 또 오랫동안 KBS창원의 <감시자들>에 출연하며 지역의 이슈에 목소리를 내 왔다.

그가 가장 경계하는 것은 사건 당사자가 아니라 변호사가 소송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소송을 위한 소송이 아니라 구제할 사람을 위한 소송이 명확한 그의 지향점이다. 지역의 쇠퇴를 고민하는 그는 공익전담 변호사가 없는 이곳에서 공익 사건의 허브 역할을 하고 싶다. 후배를 키우고 지원하며 후배들에게 올바른 변호사의 길을 만들어 주는 인간적, 공간적 터전이 되어 '좋은 노인'으로 늙어가고 싶은 그의 꿈이 이루어지기를 빈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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