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서비스에 익숙해지면서
스스로 할 줄 아는 것 없어져
서울생활 접고 지역 단칸방으로
세탁기·냉장고·에어컨 없애고
소박한 삶의 충만함 깨달아

12살 즈음, 우리 집 부엌에도 드디어 세탁기가 들어왔다. 외할머니댁에서 쓰시던 2조식 세탁기를 물려받은 것으로 세탁기와 탈수기가 붙어있는 구조였다. 이제 아무도 빨랫감이 쌓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 냉장고는 물론, 전기밥솥과 전자레인지까지 부엌의 한구석을 차지했다. 멀티탭과 부엌가구도 새로 구입해야 했다. 국이 상하지 않게 한 번 더 끓여두거나 밥이 타지는 않는지 설익지는 않는지 굳이 신경 쓸 일도 없어졌다. 끓는 물에 데워 먹던 즉석 카레는 전자레인지로 간편하게 먹을 수가 있었다. 부엌은 몹시 좁아졌지만,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기는 싫었다. 한 번 몸에 스며든 습관은 쉽게 고치기가 어려웠다.

그 결과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시나브로 게을러졌다. 운동화를 깨끗이 빨아서 신기보다는 운동화를 세탁해주는 가게에 돈을 내고 부탁했다. 세탁기가 없으면 도저히 빨래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전기밥솥이 없으면 밥을 할 줄도 몰랐다. 외식이 잦아졌다. 즉석식품이나 냉동식품을 선호하게 되었으며, 설거지가 나오지 않도록 일회용품을 애용하기도 했다. 나중에는 비질이나 걸레질은커녕 청소기를 돌리는 일조차 잘 하지 않았다. 더 편리하고 좋은 청소기는 없는지 물색해 보기도 했다. 나는 점점 서비스와 기계에 의존하려고 했다. 식당에 가는 것도 귀찮아서 배달 서비스를 이용했다. 반대로 노트북이나 스마트폰을 보면서 누워있는 시간은 갈수록 늘어만 갔다. 이를 위해서는 언제나 돈이 필요했다. 돈, 돈, 돈을 외치면서 과정을 생략하는 삶에 점점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편리함과 무기력함 = 어느 날인가, 지나친 편리함이 오히려 무기력해지는 이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 자신이 스스로 할 줄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몸을 써서 하는 일이 정말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과정이 조금만 번거로우면 기피하기를 반복했다. 동시에 좋은 결과를 쉽고 빠르게 얻고 싶어 했다. 보리차나 결명자차 끓이기를 그만두고 생수를 대량 주문했다. 사진 찍는 법을 배우는 대신, 무조건 성능이 뛰어난 카메라를 구입했다. 그런 마음으로 사 모은 물건들이 집안에 쌓여갔다. 최신 기종을 구입하기 위해 멀쩡하게 쓰던 것을 구형 취급하며 망설임 없이 처분하기도 했다. 그 물건들은 모두 인생을 편안하고 행복하게 해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았다. 거들떠보지도 않는 물건도 있었다. 커다란 냉장고 안에도 그런 먹거리들이 아주 많이 들어 있었다. 분명 이상한 일이었다. 삶은 언제나 만족스럽지 못했다.

나는 최신 기술의 편리함에 의존하고자 하는 동시에, 스스로 할 줄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우울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과연 돈과 기계가 없어도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일까. 이렇게 질문을 던지면 미래에 대한 불안과 걱정으로 되돌아왔다. 아니, 생각이라는 행위도 하기 싫었다. 그래서 자꾸 인터넷을 검색해서 내가 듣고 싶은 답을 찾아보는 것이 유일한 위안거리였다. 할 줄 아는 것이 없는 사람을 넘어 귀찮아하는 사람, 불편을 참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돈과 기계가 없으면 무기력해지는 사람이라니, 안되겠다 싶었다. 뭐든 돈으로 해결하는 삶은 더 이상 즐겁지 않았고 공허했고 계속 무언가를 먹었다. 삶의 궁극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소유와 자유 = 나는 분명 돈을 벌고 있고, 많은 물건을 소유했다. 더 소유할 능력도 있었다. 최신 유행에 뒤처지지 않고, 얼리어답터처럼 살았다. 취미 하나를 제대로 즐기려고 제대로 된 장비도 갖추었다. 나는 분명 날마다 열심히 일을 했고, 맛집 탐방도 여행도 자주 다녔다. 집에는 작은 서재도 있고, 심혈을 기울인 컬렉션도 있었다. 나는 분명 인생을 즐기고 있다고 생각했고, 세상이 변화해가는 속도에 발맞추고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나는 딱 한 가지를 가지지 못했다. 그것은 바로 '자기 돌봄 기술'이었다. 기술과 서비스와 돈. 이 세 가지가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사람이었던 셈이다.

이 같은 상태를 벗어나야겠다고 다짐한 후, 가장 먼저 보험과 적금을 해지했다. 그 다음은 술과 담배와 커피를 끊고, 채식을 하면서 그만큼의 임금노동시간을 줄였다. 돈을 주고 사야 하는 물건과 맡겨야 하는 서비스 대신 두 손으로 직접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고민했다. 절약할 수 있는 공과금의 액수에 대해 생각했으며, 차량 유지비나 식비 등에도 신경을 썼다. 또 그만큼의 임금노동시간을 줄이고 자유를 얻었다.

그보다 더 큰 결심은 경상남도의 한 작은 도시로 이사를 한 것이었다. 서울, 투룸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방 하나에 옛 부엌 하나가 딸린 집을 빌려 옮겨간 것이다. 단열도 되지 않는 이 오래된 집에서 벌써 햇수로 3년째 거주하고 있다. 세탁기와 냉장고 없이 지내고, 서울보다 한결 따뜻한 겨울에는 옷을 두껍게 입고 딱히 난방도 하지 않는다. 그러니 한여름에도 에어컨이 있을 리 만무하다. 한여름의 전기요금은 월평균 1500원 정도.

집이 작아져 월세가 절약되고, 짐도 줄었다. 15년간 살았던 서울 집에서의 짐들을 거의 두 달에 걸쳐서 정리하고 또 정리해야 했다. 사람이 살면서 소유하고 있는 물건의 개수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그중 정말 필요한 물건은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시간들이었다. 그러면서 한 가지를 더 깨달았다. 넓은 집을 원한다면 짐을 줄이면 된다는 것을.

◇생활 공간의 여백 = 덕분에 지금의 집은 꽤 넓다고 느껴진다. 방 안에는 책상을 놓지 않았다. 가구는 장롱 하나가 전부. 벽에 선반을 달아 책들을 꽂아두었고, 길에서 주워온 작은 철제 서랍장에 잡동사니들을 넣어 두었다. 그리고 한쪽 벽에 세워둔 몇 개의 악기들이 다다. 작은 부엌에도 조리에 꼭 필요한 짐들만 놓아두었다. 비건 채식이면서 주로 자연식물식을 하고 있어서 많은 조리도구가 필요치 않다. 최근에는 도마도 사용하지 않고, 과도와 가위와 두 손으로 식재료를 다듬고 있다. 데치고, 삶고, 찌는 것으로 모든 요리가 가능하고 조리 시간은 짧다. 부엌은 언제나 쾌적한 편이다. 지금 이 글을 쓰는 곳도 부엌이다. 전자레인지나 전기밥솥, 전기포트, 오븐 등도 없다. 여백으로 가득하다. 이곳은 마치, 11살 이전의 우리 집 부엌 같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때의 부엌은 작지만 고요하고 텅 빈 느낌이었다.

▲ 서울 중구 롯데하이마트 서울역점에 진열된 최신 가전제품들.  /연합뉴스
▲ 서울 중구 롯데하이마트 서울역점에 진열된 최신 가전제품들. /연합뉴스

비건 채식을 통해 단순한 요리의 즐거움을 깨치고, 공들여 솥밥을 지으면서 밥맛의 깊이와 성취감을 느낀다. 손세탁이 쉽고 잘 마르는 헌옷을 입는다. 단칸방을 빗자루로 쓸고 걸레로 닦으면서 내가 날마다 몸을 써서 하는 일이 인생의 습관이 된다. 외식은 잘 하지 않고, 배달 서비스는 거의 이용하지 않는다. 자가용 없는 생활에 익숙해져서, 대중교통 이용과 걷기를 즐긴다. 나는 이것을 가난한 삶이 아니라 느린 삶이라고 부른다.

우울감과 무력감은 많이 사라졌다. 몸을 적당히 움직이며 노동하는 지금은 날마다 간소하고 소박하고 충분하다고 느낀다. 더 많은 것을 원하지 않고, 그 때문에 삶의 자유를 잃지 않고 앞으로도 누추하고 단순하게 살고 싶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내게 꼭 필요한 만큼만 돈에 기대어 살아가는 사람이고 싶다.

◇돈과 기술 의존도 줄이기 = 보고 있자니, 기술은 언제나 편리하고 안락한 것이라고 광고한다. 화면 속 배우들은 기술 하나 하나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그러나 이를 위해 장시간의 임금노동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철저하게 감춘다. 만약 이렇듯 돈만 있으면, 스스로 할 줄 아는 것이 하나도 없어도 괜찮다는 식으로 살아간다면, 이 지구의 모든 인류가 그러한 삶의 방식을 추구한다면 얼마나 더 많은 것을 생산하고 소비하고 폐기해야 할까. 기업의 배를 불리려고 얼마나 더 많은 자연을 파괴하고 착취해야 할까.

몸을 써서 자신을 보살피며 살아가는 하루, 하루의 기쁨을 믿고 싶다. 우리 모두가 조금씩만 돈과 기술에 대한 의존도를 줄인다면, 살림이 조금씩만 간소하고 소박해진다면, 삶의 방식이 그렇게 조금씩만 더 불편해질 수 있다면 좋겠다. 지구의 호흡이 더 가빠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보다 자유로운 삶을 위하여 서서히 느려지기를 기도한다. 천천히 걸어가듯 존재하기를 기도한다. 가난한 삶이 아니라 느린 삶의 아름다움을 무한히 그리고 영원히 응원한다.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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