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산 웅상 촬영·지역배우 출연
연인 사이 디지털 성범죄 주제
"성범죄 특정 세대 문제 아냐"

"저예산 영화였는데 큰 성과로 돌아와서 위로가 많이 됐던 것 같아요."(정지혜) "상을 받게 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요."(정진혁)

지난 6일 오후 3시께 부산 수영구 민락동 한 카페. 이날 만난 양산·창원 출신 정지혜(27) 영화감독과 정진혁(28) 촬영감독은 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 부문 대상 수상 소감을 이렇게 전했다.

▲ 영화 <정순>을 제작·촬영한 정지혜(왼쪽) 영화감독과 정진혁 촬영감독. /최석환 기자
▲ 영화 <정순>을 제작·촬영한 정지혜(왼쪽) 영화감독과 정진혁 촬영감독. /최석환 기자

두 사람이 함께 제작·촬영한 영화 <정순>은 지난달 28일 개막해 지난 7일까지 열흘간 전주 완산구 고사동 영화의 거리 일대에서 개최된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대상의 영예를 안았다. 국내 3대 영화제 가운데 하나인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올해 경남 영화인 작품으로는 유일하게 상영작으로 선정된 데 이어 상까지 거머쥐게 된 것이다. 이 영화는 영화제 기간 전주에서 세 차례 상영됐다. 

두 감독은 부산에서 영화사 '시네마루'를 함께 운영 중이다. 2019년 2월 시나리오 작업을 시작한 뒤 2020년부터 영화를 준비, 2021년 1월 중순께 본격 촬영에 들어갔다. 부산에서 찍은 한 장면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양산 웅상에서 촬영됐다. 이후 부산에서 후반작업을 거친 뒤 같은 해 7~8월께 제작을 마쳤다. 이 영화에는 서울·경남·부산 지역의 배우들이 출연했다.

"저희 영화를 처음으로 관객에게 보여드릴 수 있는 자리가 전주국제영화제였어요. 상영 자체만으로도 정말 기뻤는데 예상치 못하게 대상을 받게 된 거예요. 수상작으로 호명되는 순간 펑펑 울었어요. 스태프와 배우들 모두 너무 놀라고 좋아서 많이 울었어요. 자세한 심사평을 이번에 듣지는 못했지만, 영화에 많은 분이 공감하고 지지해주셨다고 느꼈어요."(정지혜)

"대상을 받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해서인지 아직도 얼떨떨해요.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촬영구도나 기술적인 것들 위주로 영화를 봐서 (이번 영화제에서는 영화에) 집중을 잘하지 못했거든요. 영화를 보는데 옆 관객이 막 우시더라고요. 그 모습을 보면서 '영화가 주는 힘이 있구나'라는 걸 다시 한번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정진혁)

<정순>은 연인 간 영상 불법 유출을 소재로 삼은 작품이다. 영화 속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는 견과류 식품공장에서 일하는 중년 여성 노동자 정순. 같은 직장 동료 영수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 정순은 어느 날 모텔방에 함께 있던 영수 앞에 서서 속옷 차림으로 한 손에 빗을 쥔 채 노래를 부른다. 영화는 이 모습을 스마트폰으로 찍은 영수가 동의 없이 영상을 사내에 퍼뜨리게 되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따라 이야기가 흘러간다.

영화 소재는 정지혜 감독이 과거 식품공장에서 아르바이트하던 시절 쌓은 경험에서 비롯됐다. <정순>에는 부모뻘 되는 노동자들에게 반말로 지시하거나 무례하게 행동하며 존중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는 젊은 관리자와, 자식뻘 되는 관리자가 함부로 대해도 유연하게 상황에 대처하는 노동자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모두 정 감독이 일하면서 마주했던 인간 군상 중 하나였다. 정 감독은 이런 배경에 디지털 성범죄 요소를 덧입혀 시나리오를 썼다.

"공장에서 일할 당시 작은 공장이라는 사회에서 권력을 가지고 이모들에게 무례하게 행동하고, 존중하지 않는 관리자를 본 적이 있어요. 그런데 이모들이 그런 상황에 유연하게 각자만의 방식으로 잘 대처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나중에는 이모들을 향한 존경심을 가지고 시나리오를 써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어요. 대학 선배 중 디지털 성범죄를 소재로 한 장편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하게 된 적이 있는데 그 당시 자료를 찾아보니 실제로 디지털 성범죄 가해자 25%가 영수처럼 중년 남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이런 이야기도 영화에서 해봐야겠다고 판단해 시나리오가 만들어지게 됐죠."

정 감독은 영화에서 중년 여성을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로 등장시킨 건 디지털 성범죄가 특정 연령층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걸 얘기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디지털 성범죄는 특정 세대·특정 연령층만 겪는 일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젊은 여성들만 겪는다는 사회적인 편견이 있는 것 같아요. 저도 그런 편견이 있던 터라 이게 잘못됐다고 느껴서 피해 여성을 중년 여성으로 내세워 영화를 만들게 된 거였어요. 이 영화를 본 분들이 기존 편견을 깨고 모두의 문제라는 걸 인식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정진혁 감독은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보편적인 인물을 객관화해 <정순>에서 보여주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물들이거든요. 이 영화가 주는 메시지는 어느 세대에 국한되지 않고 일어나는 범죄라는 점, 더 이상 피해자가 더 힘들어지는 사회적 현상이 만들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점이에요. 디지털 성범죄를 다룬 영화를 앞으로는 만들지 않을 수 있는 세상이 빨리 오면 좋겠어요."

두 감독은 촬영 뒷이야기도 풀어냈다. <정순>은 대부분 정지혜 감독 고향인 양산 웅상에서 촬영됐는데 그 과정에서 평소 알고 지내던 동네 주민이나 건너건너 아는 분을 자주 만났다고 한다. 영화 촬영하는 걸 보다가 우연히 정지혜 감독을 알아본 동네 주민이 귤 한 상자를 건네주며 격려해준 일도 있다고 했다. 또 영화에는 정지혜 감독 부모와 정진혁 감독 모친, 모친 지인들도 카메오로 출연했다고 한다. 이들은 각각 모텔과 백숙집 손님 역할을 맡았다.

▲ 전주국제영화제 시상식에서 정지혜 감독이 소감을 말하고 있다.  /정지혜 감독
▲ 전주국제영화제 시상식에서 정지혜 감독이 소감을 말하고 있다. /전주국제영화제

<정순>은 정지혜 감독의 첫 번째 장편 영화이자 단편 포함 네 번째 작품이다. 그는 극장 개봉을 목표로 배급사와 협상을 진행할 예정이다. '아줌마 누아르'라는 주제로 차기작 시나리오를 구상하면서 개봉 절차를 밟겠다는 게 정 감독 계획이다. 늦어도 내년 3월 전 개봉이 목표다.

"앞으로도 부산에서 <정순> 개봉과 시나리오 작업을 병행할 생각이에요. 지역 영화인들이 저희 영화를 보시고 같이 힘을 얻으셨으면 좋겠고, 지자체에서는 이런 결과가 있으니 계속해서 관심 많이 두고 지원해주셨으면 좋겠어요."(정지혜)

"저희 영화가 개봉 이후 더 많은 분에게 보였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영화사 시네마루도 계속해서 영화를 할 거니까요. 많은 관심 주셨으면 좋겠습니다."(정진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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