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의 눈으로 본 7년 전쟁 (3) 의병, 일어서다

의령 동쪽지역 사족 곽재우
전쟁 8일째 의병 일으켜 맞서
함정 파 일본군 내쫓는 등 성과

1592년 음력 5월 2일, 한양이 일본군에게 점령됐다. 전쟁 발발 불과 20일 만이었다. 이렇게 쉽게 한양을 빼앗긴 것은 일본군에 맞서 방어선을 구축해야 할 경상도 지역이 너무나 쉽게 무너졌기 때문이었다. 경상도 각 지역 수령들은 예상을 벗어난 일본군의 침공 규모에 놀라 도망치는 일이 잦았다. 연구에 따르면 전쟁 초기 경상도 지역 수령 67명 가운데 도망친 것이 확인된 것만 25명에 이르렀다. 이는 김성일의 장계에서도 잘 나타난다.

◇초유사 김성일의 활약 = "본도(경상도)의 순찰사는 상경하였고, 병사에게는 군사가 없고, 수사는 병영을 잃었습니다. 잔존한 고을이란 다만 거창, 안음, 함양, 산음, 단성, 진주, 사천, 곤양, 하동, 합천, 삼가 등 10여 곳에 불과합니다. 백성들은 모두 깊은 산으로 들어가고 없어 빈 성만이 남게 되었으며, 비록 수령과 임시 장수가 있다 하여도 호령이 시행되지 않았고, 병사를 모으는 일도 되지 않으니, 얼마 안 가 모든 고을이 적의 소굴이 될 것입니다."

▲ 의령군이 곽재우 홍의장군과 의병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만든 의병광장.  /연합뉴스
▲ 의령군이 곽재우 홍의장군과 의병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만든 의병광장. /연합뉴스

5월 4일, 김성일은 경상도 초유사(招諭使)로 함양에 도착했다. '초유(招諭)'는 "불러서 타이른다"는 뜻으로 김성일은 경상도 지역의 방위 체계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역할을 맡았다. 이황의 제자로 경상도 지역에 광범위한 인맥을 가지고 있던 김성일은 초유사로서 제격이었다. 그는 함양에 도착하자마자 함양군수 이각에게 주민들을 다시 모으라고 지시했으며, 김성일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산음 현감 김락은 병력 800명을 모아왔다. 이어 김성일은 일본군 침공에 겁을 먹고 달아난 수령들을 관내로 복귀시켰다. 단성 현감 이제, 삼가 현감 장령, 함안군수 유숭인이 관아로 복귀했다.

이어 수령이 복귀하지 않거나 행방을 알 수 없는 경우 김성일은 고령군, 의령군, 초계군에 지역 출신 인사로 임시 수령을 세웠다. 이어 일본군의 보급선인 영산과 창녕지역에 임시로 장수를 세워 일본군에 맞서게 했다.

초유사 김성일의 활동 가운데 가장 중요한 대목은 의병활동을 독려한 것이었다. 조선 조정이 보기에 왕과 수령의 승인 없이 독자적으로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반역을 꾀한다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김성일은 경상도에 도착하자마자 격문을 띄우고 의병활동을 장려했다. 그리고 의병과 관군 사이 마찰이 있을 때에는 직접 나서 중재를 서고, 의병이 관군에 편입될 수 있도록 주선하고, 관군과 마찬가지로 보급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그리하여 경남 중·서부 지역을 중심으로 의병활동이 적극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곽재우와 정인홍의 의병활동 = 조선은 선비의 나라였다. 1500년대가 되면 지역 유지 집단은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사족(士族)이 장악했다. 서원·향교를 바탕으로 사상적 기반을 다지고, 유향소·향약 보급으로 지역 장악력을 높여갔다. 이들은 사족 간 결혼을 통해 영향력을 유지해나갔다. 이렇게 다져진 사족의 영향력은 의병운동에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일단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심하면 자신과 함께 공부한 문인과 더불어 자신이 거느린 노비와 거주지 인근 영향력 하에 있는 주민을 의병대에 편입시킴으로써 의병활동이 시작된다. 7년 전쟁 당시 승병 등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지역 사족 출신이 의병을 일으켰다.

▲ 의령 의병광장에있는 곽재우 동상./연합뉴스
▲ 의령 의병광장에있는 곽재우 동상./연합뉴스

곽재우는 1585년 과거 시험에서 2등으로 합격했으나 답안 문구 중 일부가 선조 임금의 심기를 거슬러 합격이 취소되었다고 한다. 그는 의령군 동쪽, 남강과 낙동강이 접하는 기강나루 인근에서 살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 곽월은 황해도 관찰사를 지냈고, 어머니는 진주 강씨, 계모는 김해 허씨였다. 특히 그가 나고 자란 의령 세간리는 어머니 일가인 진주 강씨의 영향력이 매우 강한 곳이었고, 계모 집안은 부호였다. 처는 남명 조식의 외손녀였다.

이러한 기반을 갖고 있던 곽재우는 전쟁이 일어난 지 8일째인 4월 22일 의병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10여 명만 따랐으나 재산을 풀어 의병을 적극적으로 모았다. 곽재우는 압도적인 전투력을 가진 일본군과 정면 대결을 하기보다는 게릴라전을 통해 일본군에 맞섰다. 5월 4~6일 곽재우는 자신이 지내던 의령군 기강나루에서 일본군 보급선 11척을 물리치는 성과를 거두게 된다. 이때 강에 말뚝을 박아 일본군 수송선의 움직임을 제한했다고 한다.

◇보급선을 끊는 게릴라전 = 한편,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가 이끄는 일본군 제6군은 전라도 점령을 목표로 이동하고 있었다. 선봉은 안코쿠지 에케이(安國寺惠瓊)로 병력 2000여 명을 이끌고 전라도로 향하고 있었다. 5월 24일께 안코쿠지는 의령 정암진을 건너기 위해 도하 지점에 미리 팻말을 세워놓았다. 곽재우는 이것을 보고 밤새 팻말 위치를 늪지 방향으로 바꿔놓았다. 일본군은 곽재우가 유도한 대로 늪으로 빠져들었으며, 곽재우는 자신과 같은 붉은 옷을 입힌 병사들로 일본군을 혼란에 빠뜨렸다. 이어 의병 50여 명으로 공격해 안코쿠지는 정암진에서 철수했다. 6월 초, 안코쿠지는 다시 병력을 모아 현풍역에서 낙동강을 건너 성주 방면으로 향하려 했으나 곽재우 의병대는 이때도 이들을 저지했다.

정인홍 또한 곽재우와 마찬가지로 강력한 지역 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일가는 합천 야로현에서 정착하면서 이 지역 유력 가문인 야로 송씨, 진주 강씨, 진주 하씨, 남평 문씨, 선산 김씨와 혼인을 통해 기반을 다졌다.

정인홍은 5월부터 의병을 조직하고 합천~고령 방면 낙동강 서쪽에 머물면서 일본군 후방을 노렸다. 정인홍 의병대는 6월 4일부터 6일까지 고령군 성산면 무계리 부근에서 낙동강 보급 호위 임무를 맡은 일본군 제7군 소속 무라가미 가게치카(村上景親) 휘하 병력 140명과 교전해 낙동강변에 설치한 일본군 거점 시설들을 파괴하고 일본군 보급물을 불태웠다. 6월 17일께에는 정인홍 의병대 부장 손인갑이 성주군 용암면에서 복병으로 일본군 보급부대를 습격하기도 했으며, 6월 19일부터 22일까지는 합천군 초계리에서 일본군과 여러 차례 전투를 벌여 모두 승리했으나 손인갑은 전사하고 만다. 7월 6일, 정인홍은 합천·고령·성주 지역 의병·관군 등 연합병력 2800명을 이끌고 안언역(현 성주군 용암면 상언리 부근)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과 교전해서 일본군을 괴멸하고 많은 일본군 보급품을 빼앗았다. 특히 안언역은 고려시대부터 교통의 요지로 현풍·창녕·고령·합천과 연결되는 곳이었다.

◇일본의 새 전략 = 일본군은 전쟁 20일 만에 한양을 점령했으나, 선조 임금이 의주로 피난하면서 조선에서 신속하게 전쟁을 끝내고 명나라로 진격하려 했던 전략은 완전히 어긋나게 되었다. 전쟁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몰랐다. 이에 일본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이끄는 일본군 제6군은 전라도 점령을 목표로,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가 이끄는 제7군은 경상도 지역 완전 점령을 목표로 움직이고 있었고, 이를 위해 김해~성주로 이어지는 낙동강을 따라 보급선을 이어가려 했다. 그러나 곽재우와 정인홍, 김면 의병이 낙동강변 곳곳에서 보급선을 괴롭히면서 낙동강 보급을 포기하고 청도~대구로 이어지는 보급에 의존해야 했다. 일본군 입장에서는 이런 식으로는 전라도와 경상도 점령은 사실상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일본군 제6군 지휘관 고바야카와는 병력을 성주·김천 방면에 집결시킨 뒤 빠르게 서쪽으로 이동해 전라도 금산 지역을 점령했다. 그리고 병력 일부를 지례(현 김천시 지례면)~거창 방면으로 보냈다. 낙동강 서쪽 강변에 위치한 의병들의 후방을 공격하고, 전라도로 향하는 길을 안전하게 확보하고, 경상도 최대 도시인 진주까지 내려가기 위한 포석이었다. 1592년 여름, 경남 서북부 지역에서 일본군과 조선군·의병의 치열한 전투가 곳곳에서 벌어지게 된다.

※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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