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속 클래식 이야기 - 〈샤인〉(1996)

1등 고집하는 아버지 그늘 아래
억눌려 지낸 천재소년 데이비드
재능 알아본 스승 만나 급성장

지난 16일, 미국으로부터 멋진 소식이 날아들었다.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역대 최연소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반 클라이번 콩쿠르는 미국의 피아니스트 '반 클라이번' (Van Cliburn·1934~2013)을 기념하기 위하여 창설된 세계적인 국제 콩쿠르이다. 4년마다 열리는 경연으로 이전 대회(2017)에서 선우예권이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우승을 차지하였으니 이번의 낭보는 한국인으로서는 두 번째이자 2회 연속 한국 피아니스트의 우승이다.

최근의 한 달간은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싶을 정도의 놀라움이었다. 파가니니 콩쿠르에서 이미 우승을 경험한 바이올리니스트 양인모는 시벨리우스 콩쿠르에서 1등을 차지하며 다시 한번 자신의 실력을 입증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계 3대 콩쿠르의 하나인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기쁜 소식이 들려왔다. 첼리스트 최하영의 우승 소식으로 그동안 많은 이 대회의 우승자가 있었지만 첼로 부문으로는 처음이다. 여운이 가시기도 전 이어진 임윤찬의 우승 소식, 2019년 윤이상 국제음악콩쿠르를 석권하며 차세대를 이끌어갈 피아니스트로 주목받던 인재가 국내를 넘어 세계에 자신의 이름을 새긴 것이다.

이러한 그의 우승 소식은 훌륭한 핑곗거리가 되었다. 그동안 미루어 오던 영화와 그 속에 담긴 클래식의 명곡을 소개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파이널 2라운드, 임윤찬의 손끝에서 그 곡이 울려나올 때 영화 속 주인공의 모습과 겹쳐 보이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영화 <샤인>(1996)을 본 이라면 말이다.

▲ 영화 <샤인> 스틸컷.
▲ 영화 <샤인> 스틸컷.

◇아버지와 불화 = 호주의 어느 가난한 가정, 평범해 보이는 데이비드 헬프갓이지만 피아노에 재능이 예사롭지 않다. 아버지의 엄격한 가르침 덕이기도 했지만 타고난 기질이 훌륭한 피아니스트인 것이다. 어릴 적 바이올린에 대한 열정을 꽃피우지 못한 아버지 피터는 데이비드만큼은 자신을 대신해 꿈을 실현하길 바란다. 그러던 어느 날 피아노를 가르치겠다며 찾아 온 로젠, 심사위원이었던 그는 비록 2등이었지만 실력을 알아 챈 것이다. 차갑게 돌려보내는 피터. 하지만 자신이 가르치기엔 역부족임을 알고는 로젠을 찾아가 아들을 부탁한다. 지닌 재능에 정상적인 교육이 더해져 빠르게 성장하는 데이비드. 그리고 마침내 그토록 바라던 콩쿠르에서의 1등과 여기에 미국 유학의 기회가 함께 얻어진다. 강력히 반대하는 피터. 자신의 통제와 품 안에서 내어놓을 생각이 없는 아버지. 돈이 없다는 것은 핑계일 뿐 로젠의 성의와 데이비드의 열정을 가로막고 나선 것이다. 그 짙은 그늘 아래서 데이비드의 영혼이 망가지기 시작한다. 이미 어릴 적부터 심약했던 데다 억압이 더해진 상황에 급기야 자폐적 증상까지. 그러다 찾아 온 두 번째 기회, 영국 왕립 음악원으로부터의 입학 허가서. 이번만은 놓칠 수 없어 데이비드는 처음으로 아버지를 반하며 유학길에 오른다. 그렇게 둘의 관계는 원망과 분노만이 남았다.

그곳에서 두 번째 스승 파키스를 만나 자신의 꿈을 키워가는 데이비드. 이미 학교에서 천재 피아니스트로서의 그의 명성은 자자하다. 그러다 맞이한 학내 콩쿠르, 그는 쉬 도전하기 힘든 곡을 선택한다. "미치지 않고서야 이 곡을 연주할 수 없다네 (파키스)" "전 충분히 미쳤어요, 그렇죠? (데이비드)" 피아노라는 악기가 낼 수 있는 기교의 끝이며 아버지 피터로 하여금 가르침에 있어 한계를 깨닫게 했던 곡. 데이비드는 초인적으로 연습에 매달린다. 소위 자면서도 연습한다는 수준이다. 드디어 다가온 콩쿠르, 모두가 기대로 숨죽인 가운데 그의 신들린 듯한 연주가 이어진다. 마침내 성공적으로 연주가 끝나고 모두가 환호하는 그때, 스스로 충분히 미쳤다던 그가 이젠 완전히 미쳐버리고 만다. 피아노의 악마가 그를 통째로 집어삼켜 버린 것이다. 연주가 끝나자 자리에서 쓰러져 버린 데이비드, 간신히 몸을 추스른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보지만 아버지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영국 유학 때 학내 콩쿠르 출전
라흐마니노프 작곡 '기교의 끝'
피아노 협주곡 3번 선택해 연주
초인적인 연습으로 환호 받지만
그 자리에 쓰러진 후 정신 잃어

 

◇신들린 연주 =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장소는 정신병원을 비춘다. 그곳에서 생활하는 데이비드. 정신은 온전치 않지만 피아노에 대한 애정만큼은 변함이 없다. 그러다 우연히 병원 밖 세상으로 나올 기회를 얻었고 그렇게 '헬프갓'이 아닌 '샤인'으로 두 번째 인생이 시작된다. 억압과 집착에 짓눌렸던 그의 남은 삶엔 과연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무겁게 짓누르는 아버지의 그늘을 그는 과연 지울 수 있을까?

모두가 기대로 숨죽인 가운데 피아노 위에 안경을 벗어 얹은 피아니스트가 연주를 시작한다. 날렵한 손놀림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가 예사롭지 않다. 어느덧 분위기가 바뀌어 서정적인 악상에 들어서고 그의 실력은 기교에만 있는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드디어 시작된 피날레, 긴박한 연타가 들려오는 가운데 오케스트라는 이에 화답, 절정을 향해 달려간다. 시종 눈을 감은 피아니스트의 얼굴은 땀으로 가득하다. 그러다 밀려온 정적, 너무 빨라 보이지 않던 손가락의 움직임이 느리게 지나가고 세상의 시간은 이 순간 멈춘 듯하다. 영화 <소울>(2020) 속 등장했던 모든 것을 초월한 순간에야 도달하는 중간계에 속한 것이다. 드디어 도달한 코다(종결), 모두가 환호하는 가운데 아직 중간계를 빠져 나오지 못한 주인공은 무너지듯 쓰러진다.

영화 <샤인> 속 주인공의 학내 콩쿠르에서의 연주 장면이다. 그렇다면 영화를 대표할 만한 이 명장면에서 흐르는 곡은 무엇일까? 스승 파키스가 미치지 않고는 연주할 수 없다 했고 임윤찬이 파이널에서 연주한 바로 그 곡. 바로 러시아의 작곡가 '라흐마니노프'(Sergei Rachmaninoff·1873~1943)의 '피아노 협주곡 3번'(Piano Concerto No. 3, D minor op.30)이다.

◇코끼리를 위한 작품 = 1909년 이바노프카의 평화로운 시골집, 라흐마니노프는 제2의 인생을 준비 중이었다. 자신의 미국 데뷔 무대가 얼마 남지 않았던 것이다. 이미 자신의 2번 협주곡이 현지에서 구가 중인 상황. 작곡가는 다시 한번 자신의 기량을 과시하며 청중을 휘어잡을 작품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구상되고 작곡된 것이 바로 피아노협주곡 3번이다. 가히 피아니스트의 한계를 시험할 만한 무시무시한 작품이 탄생한 것이다. 곡의 난해함을 측량하는 데 여러 측면이 존재하겠지만 전문가가 아닌 입장에서 과연 어렵겠구나 선뜻 이해할 만한 것이라면 일단 작곡가 라흐마니노프는 세상에서 가장 손이 큰 피아니스트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 크기가 30cm를 넘어 무려 13도의 음정을 짚을 수 있었다니 놀랍다. 게다가 작곡된 곡이 마디 안 가장 많은 음표가 존재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니 그 연주상 어려움이 쉬 상상이 가지 않는다. 완성된 곡은 동료 피아니스트이자 평생의 친구였던 '요제프 호프만'(Josef Hofmann)에게 헌정되었다. 하지만 정작 호프만 자신은 손이 작아 한번도 공식적인 연주회를 하지 못했다. 정작 이 곡을 작곡한 라흐마니노프조차도 '코끼리를 위한 작품'이라며 당혹스러워 했다고 전해지니 요구되는 테크닉이 얼마나 극악한지 알 수 있다.

이런 악마적인 작품을 선택한 '데이비드', 그는 스스로를 한계로 몰아붙였다. 그러다 결국 중간계로 진입, 법열의 단계에 올랐지만 결국 돌아오지 못한다.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 맞섰던 괴물(피아노 협주곡 3번)은 상상치 못할 만큼 강했던 것이다.

/심광도 시민기자(뮤직 파라디소 대표)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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