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속 경남을 읽다
(13) 연꽃 사이를 걸으며 읽은 시 몇 편... 구멍 숭숭하며 피워올리는 연꽃이 건네는 말

함안으로 출장을 갔다. 아침부터 구름이 어둑하니 낮게 깔리고 빗방울이 바람 틈에 끼어 날리는 날씨였다. 빗길 안전 운전 20% 감속. 고속도로 전광판이 나의 안위를 걱정해 준다. 일찍 길을 나선 것은 어찌 알고 졸리면 쉬어 가라며 오지랖이다. 혼자 길을 나서면 온갖 것들이 말을 걸어온다. 고마울 따름이다.

보자, 내가 함안을 언제 가 봤더라? 곰곰 생각하는데 헉, 갔던 기억이 없다. 나의 기억력 수준이나 기억의 태생적 한계를 고려한다 해도 이토록 기억이 없다니. 그럼 이 길이 첫 함안행이란 말인가. 함안 수박을 그렇게 먹었으면서도 남해고속도로를 수없이 지났으면서도 함안이 처음이라니.

 

모든 첫 번째가 나를 끌고 다니네

……

모든 설렘과 망설임과 회한을 지나

모든 두 번째와 모든 세 번째를 지나

모든 마지막 앞에 나를 짐처럼 부려 놓으리

나는, 모든, 첫 번째의, 인질,

잠을 자면서도 나는

아침에 들은 첫 노래를 흥얼거리네

나는, 모든, 첫 기척의, 볼모

-김혜순, '모든 첫 번째가 나를'

 

첫 번째는 모든 나중의 시작이니 신중해야 하기도 하고, 모든 가능성의 출발이니 과감해야 하기도 하다. 첫 번째이니 함안이 끄는 대로 맘껏 끌려다니겠다! 하고 마음을 먹다가 아차, 출장 가는 길이었지.

생활인에게 '맘껏'이란 단어는 대체로 사치이다. 생활인에게 친숙한 단어는 '짬'이다. 짬을 내서 산책을 하고 짬을 내서 차를 마시지. 직장인에게 짬은 대체로 점심쯤에 빼꼼히 있다. 마침 해도 짬을 내어 빼꼼 얼굴을 내민다. 첫 함안인데 짬이어서 아쉬워 신중하게. 어디로 갈거나, 검색!

연꽃… 파크… 개화…

파크는 좋아하는 단어가 아니지만 '연꽃'에 끌려버렸고, 이어 검색된 단어 '개화'에 여기로 결정.

◇함안연꽃테마파크 = 첫 번째 함안이지만 길은 부처님 손바닥이다. 스마트폰에 지도 어플을 띄우고 함안연꽃테마파크 도착. 함주공원, 함안공설운동장을 지나 주차장을 찾아 두리번거리는데, 안 뵌다. 공설운동장 쪽에 주차하고 걸어 왔어야 했나 보다. 길가에 적당히 대충 차를 세웠다.

 

출장으로 난생처음 함안 방문
연꽃테마파크 연밭 돌아보며
함안 고향 시인 이수익 시 생각

연밭 사이로 길이 나 있고, 길 좌우로 구획을 지어 연꽃들이 커다란 얼굴을 피워내고 있었다. 아라홍련. 2009년 성산산성 연못의 퇴적층에서 발굴되어 탄소연대측정 결과 700여 년 전 고려시대 연꽃 씨앗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 역사성에 기대어 함안에 터했던 아라가야에서 그 이름을 가져와 아라연꽃이라 명명했다고 적고 있다. 가람백련은 시조시인 이병기 선생이 길렀다고 하여 그의 호를 따서 이름했다 한다. 내게 연꽃은 고요하여 수수한 이미지인데 법수홍련은 분홍분홍이 넘쳤다. 연꽃도 이렇게 화려할 수 있구나.

연꽃이 피는 계절은 언제나 덥다. 저기 징검다리를 가로질러 정자에 앉아 좀 쉬어야겠다 했는데, 또 온갖 것들이 말을 걸어온다. "더운데 좋나?" 액자 모양의 포토존에 해시태그까지 붙이고 적어놓은 말에 피식 웃는다. 연꽃 구경 좀 해 본 사람이군.

 

나의 첫 연꽃

 

아수라의 늪에서

오만 번뇌의 진탕에서

무슨

저런 꽃이 피지요?

 

칠흑 어둠을 먹고

스스로를 불사른 듯 화안히

피어오른 꽃봉우리

-이수익, '연꽃'

 

◇군복무와 상상 = 함안이 고향인 이수익 시인이 본 연꽃이 테마파크의 연꽃은 아니겠지. 어떤 연꽃이든 늪과 진탕에서 하안히 피어올리지. 내 깜냥으로는 이수익 시인의 아수라와 번뇌를 읽지는 못하고 그저 한 시절 내 마음에 들었던 연꽃을 생각했다.

26살, 군 복무 중일 때이다. 동기들은 복무를 마치고 복학을 하고, 나는 졸업을 하고 군엘 갔다. 남들처럼 하라는 부모님의 말씀을 흘렸다. 새겨듣지 않는 게 청년의 특권이긴 하다. 새겨듣지 않아서 후회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 시절 청년인 내 기질이 그러했다는 것이다. 여하튼, 남들보다 두어 살 많은 군인 아저씨가 되었다. 병영 담을 넘어 불어온 풍문은 시원하지 않았다. 나는 고여 있고 벗들은 흐르고 있다는, 겨우 잠재우고 있던 생각을 깨우는 바람이기 때문이었다. 지나고 보면 별거 아닌 일이지만 그 시절은 유난스럽다.

 

군인 때 마주쳤던 연못 떠올라
무더위에 지친 채 꽃 구경하다
연꽃이 걸어온 말에 위로 받아

휴가 나가서 만난 벗들은 나를 걱정했다. 두어 살 어린 친구들을 고참으로 동기로 더불어 지내야 하는 나를 안쓰러워했다. 내가 안쓰럽게 생각되지는 않았으나 나도 내가 걱정이긴 했다. 벗들아, 이왕 걱정을 해주니 내 걱정은 여기 두고 가마 하며 호기(浩氣)를 부린다. 호기를 부린다 하여 좋은 시기, 호기(好期)가 되는 건 아니다. 걱정 인형이 되어 복귀를 했다. 햇살이 따끔거리는 여름의 초입이었다.

▲ 함안연꽃테마파크에 핀 연꽃. /이헌수 시민기자
▲ 함안연꽃테마파크에 핀 연꽃. /이헌수 시민기자

위병소를 지나 약간의 오르막을 지나면 연못이 있었다. 연못의 모습은 형편없는 기억력에다가 그나마의 기억 조각도 시간이 갈아내버려 남은 게 없다. 괜찮다. 없는 기억은 상상하여 조작해 내면 된다. 연못하면 으레 그려지는 모양이 있지 않은가. 둥글고, 가장자리에는 부들과 창포와 등등이 있고, 연못 중앙에 누군가의 취향이었을 조잡한 분수가 있고, 분수 둘레로 부평초와 부레옥잠이 둥둥. 조작한 기억 사이에 핀 연꽃은 실제이다.

넓적한 연잎에 앉았던 개구리가 인기척에 놀라 물속으로 폴짝 뛰어든다(이건 관습적인 상상). 위병소를 지나며 오르막을 올라온 군인 청년은 땀범벅이다. 군복은 덥고 군화는 무거운데(이건 실제) 걱정까지 한 아름 안았으니 그의 걸음에는 군인다움 따위는 약으로 쓸 개똥 같았다. 개똥 같은 걸음을 멈추고 군인 청년은 연못을 본다. 유난히 크고 환하게 웃는 꽃이 눈길을 끌었다. 햇빛이 스포트라이트처럼 그 꽃에만 비치는 듯도 싶었다. 수련이다. 혼자 길을 걸으면 온갖 것들이 말을 걸기 마련이다. 어이, 거기 청년 쉬어 가도 돼.

 

연꽃이 피면

달도 별도 새도 연꽃 구경을 왔다가

그만 자기들도 연꽃이 되어

활짝 피어나는데

유독 연꽃 구경을 온 사람들만이

연꽃이 되지 못하고

비빔밥을 먹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받아야 할 돈 생각을 한다

……

오히려 연꽃들이 사람 구경을 한다

……

-정호승, '연꽃 구경' 중에서

 

◇연근이 있어서 연꽃 = 연꽃이 인쇄된 엽서를 구했다. 제대하고서도 연꽃 엽서를 꽤 오래 갖고 있었다. 내 기억 속에 남은 연꽃이 연못의 연꽃인지 엽서의 연꽃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연꽃이 되지는 못하였으나 연꽃을 보며 비빔밥이나 돈을 생각하지 않았으니 구경거리는 안 되게 산 듯싶다.

빼꼼한 짬도 끝.

급식소 반찬으로 연근이 나왔던 때이다. 옆에 앉은 학생에게 별 생각없이 연근이 연꽃 뿌리인 거 아나 했더니, 학생이 정말요 하며 놀란 말로 반응했다. 선생의 시답잖은 얘기에도 반응해주는 리액션 좋은 고마운 학생일 수도 있겠고, 정말 몰랐을 수도 있겠지. 그 리액션에 용기를 내어 진지충이 되어 말을 이었다. 연꽃 정도 되는 것을 그 진흙뻘에서 줄기를 곧추 세워 물 위로 피워 올리려면 뿌리에는 숭숭한 구멍 정도는 있어야지. 저마다 숭숭한 구멍 정도는 안고 한 시절 넘는 거지. (아, 이런. 말이 많으면 후회가 따르기 마련이다.)

이제부터 연꽃이 한창일 터이다. 혼자 걸으면 온갖 것이 말을 건다. 20여 년 전처럼 연꽃이 쉬어 가라고 말을 건넨다. 고마울 따름이다.

/이헌수 시민기자(메깃들마을학교 운영위원)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