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길 매개 선진지역과 교류
외래 문물 경유지이자 집산지

청동제칼집 장식 부속품 확인
중국 청동거울 파편 발굴
일본 야요이계 토기도 나와

소가야 이전부터 번성기까지
주거지·세력 중심지 역할 추정
군, 내년 하반기 사적지정 준비

전기 가야는 고성을 비롯한 거제·김해·창원·함안 등 남해안 인접 지역에 있던 소국들이 번성하던 시기였다. 기원 전후 창원·마산·고성·사천·진주 등지에서 인구 3000∼3500명 규모의 소규모 정치 세력들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그렇게 생겨난 소국들은 세를 떨치며 한 시대를 구가했다.

고성반도에 있던 가야국 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은 특정 세력 지배 아래 있지 않았다. 독립적인 존재로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성장 기반은 바다였다. 너른 한려수도 앞바다를 무대 삼아 가야 후기 소가야로 성장했다. 송학동고분군으로 대표되는 소가야는 고성에만 머물지 않았다. 근거지를 넘어 사천과 진주, 산청 일대까지 세력을 넓혔다.

고성지역 가야국은 남해안 교역 중심지이자 대외교역 거점이었다. 이렇게 발전할 수 있었던 배경은 외교와 교역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바닷길을 매개로 선진지역과 교류한 소가야는 5세기 이후 중국, 일본 등 외래 문물의 경유지이자 집산지였고, 일본열도와 영산강 유역 문물이 가야로 들어오는 입구였다. 경상도 내륙 신라계와 대가야계 문물이 일본열도와 영산강 유역으로 나가는 주요 기항지이기도 했다.

이를 증명하는 유적이 고성에 여럿 남아있다. 그중에서도 고성읍에 있는 동외동패총은 고성이 과거 해상 세력 중심지였다는 점을 잘 일러준다. 이른 시기부터 해상 대외교역이 활발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고고학적 자료가 ‘고성패총’, ‘당산패총’이라고도 불리는 이 유적에서 드러난다.

소가야 해상 세력 중심지였던 고성 동외동패총 원경. /삼강문화재연구원
고성 동외동패총 발굴조사 과정에서 확인된 출토유물들. /삼강문화재연구원

대표적으로 소가야 최고 지배계층이 사용한 청동제 칼집 장식 부속구와 화폐 기능을 하는 유물인 대천오십전, 낙랑계통의 사치품인 금박을 한 개궁모(마차 수레 부속품 일종)가 이 유적에서 출토됐다. 윗단 중앙부 제사유적에서는 두 마리의 새가 마주 보는 청동 장식(조문청동기)이 원형에 가까운 형태로 나왔다.

동외동패총에서 출토된 대천오십전. 이 유물이 내륙에서 확인된 건 동외총패총이 첫 사례다. /삼강문화재연구원
로 소가야 최고 지배계층이 사용한 청동제 칼집 장식 부속구. /삼강문화재연구원
동외총패총 출토유물 청동환. /삼강문화재연구원

중국 청동거울 파편 등 중국제 문물과 왜 계통의 청동창, 일본 야요이계 토기 등도 발견됐다. 동외동패총 유적 아랫단에서는 철 생산 작업장인 야철지(冶鐵址)가 확인됐다. 1~3세기 소가야의 제철을 보여주는 시설과 지도자 존재를 일러주는 증거가 대거 확인된 것이어서 의미가 크다는 평가가 나온다.

고성 동외동패총 일대에 조개껍데기가 드러나 있다. /최석환 기자

동외동패총은 일제강점기인 1914년 일본 학자 도리이 류조(鳥居龍藏)에 의해 2차례 유물 수습이 이뤄진 이후 1969년부터 2022년까지 모두 8차례에 걸쳐 발굴조사가 이뤄졌다. 그 과정에서 환호가 남쪽으로 길게 이어져 있다는 점과 국내에서 지금까지 발견된 대지조성층 중 가장 이른 시기(4세기 이전 추정)에 만들어진 삼한~삼국시대 대지조성층이 확인됐다. 가야 토성 하면 김해 봉황동 토성과 함안 가야리 토성을 손꼽는데, 이들과 맞먹는 토목 기술로 만들어진 성토벽이 드러난 것이다.

동외동패총 안팎에서 확인된 토기편. /최석환 기자

지난 11일 오후 현장에 동행한 소배경 삼강문화재연구원 조사과장은 소가야 시작과 끝을 같이하는 유적이자, 소가야 왕도의 중심 취락이 동외동패총이라고 밝혔다. 소 과장은 “동외동패총은 일반 패총이 아니라 토성이자 성곽”이라며 “소가야 최고지배층이 일대에 환호와 성토구조물을 만들고 취락을 일궈 생활했다고 볼 수 있다. 낙랑계 최고 유물이 여기서 쏟아져 나올 수 있었던 배경”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전국에서도 손에 꼽을 만한 유물이 여럿 발굴됐다며 유적 가치를 높게 평가했다. 그는 “최고급 유물인 대천오십전이 지난해 패총 발굴조사 때 나왔는데, 낙랑 이외 지역에서 대천오십전이 발굴된 건 제주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라고 했다. 또 “내륙에서는 고성 말고 출토 사례가 없다”며 “그 당시 최고의 교역품 중 하나인 조문청동기는 우리나라에서 지금까지 2점 확인됐는데 여기서 1점이 나왔다. 한·중·일 모든 유물이 나오는 것만 봐도 유산 가치가 상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고성 동외동패총 비석과 주변 풍경. 기념물로 지정된 동외동패총을 사적으로 지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최석환 기자 

고성읍 중심지에서 동쪽에 치우친 야산(해발 약 32.5m)에 자리한 동외동패총은 2세기 말~6세기 초에 조성됐다. 지역에서는 패총이 있는 야산을 두고 수호신 역할을 하는 산이라고 해서 ‘당산(堂山)’이라 부른다. 그중 일부(1만 8916㎡)가 경남도 기념물 제26호로 지정됐다. 유적이 분포한 산꼭대기는 평평한 지형을 이룬다. 주변으로는 낮은 충적평야가 비교적 넓게 형성되어 있다.

동외리에서 만난 마을 주민들은 패총이 있는 산이 과거부터 사람이 자주 드나들던 장소가 아니라고 말했다. 고성읍이 고향이라는 서환법(68) 동외마을 이장은 “(패총이 있는 곳은) 당산이라고 해서 사람들이 많이 올라가지 않던 곳이었다”며 “산 주변이 모두 밭이고 논이었다. 주민들이 잘 올랐던 산이 아니어서, 어렸을 때는 (동외동패총이) 문화재라는 걸 알지 못하다가 나중에야 알게 됐다”고 했다.

어릴 때부터 산에 문화재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는 김종규(69) 씨는 “7~8살 때 외지인들이 패총 땅을 파서 도굴해가는 걸 자주 봤다”며 “기다란 걸로 땅을 푹 찔러서 뭐가 있는지 본 다음 도굴해가고 그랬다. 도굴한 걸 팔아서 돈을 벌고 했다는데 그 당시 이를 제재하는 마을 사람은 없던 거로 안다”고 했다.

동외동패총 일대 전경. /최석환 기자
동외동패총 일대 전경. /최석환 기자

이날 찾은 동외동패총은 군이 설치해놓은 울타리가 빙 둘러쳐진 상태였다. 유적 안에 들어가면 또 다른 울타리로 둘러싸인 사유지가 일부 드러났다. 문화재 구역 중 군유지는 6576㎡뿐이었으며, 유적 안팎으로는 주민 텃밭이 개간된 모습이었다. 일대에서는 토기편과 조개껍데기 등이 눈에 띄었다. 산 아래 야철지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에는 민간 교회가 들어서 있었다.

소 과장은 도 기념물로 지정된 동외동패총을 사적으로 승격시켜 관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문화유산 중요성에 비해 문화재 지정범위가 협소하다”며 “이와 비슷한 성격의 유적은 모두 사적으로 지정돼 있지만, 동외동패총은 사적으로 지정돼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어 “가야 중에서도 가장 이른 시기 토성이 이곳에서 확인된다”며 “왕성 후보지로도 볼 수 있는 유적”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고성군은 이르면 내년 하반기 사적 지정 절차를 밟을 예정이다. 배명숙 군 가야사복원 TF팀 담당 계장은 “동외동패총을 국가 사적으로 지정해서 시민들에게 돌려주는 게 고성군 계획”이라며 “도에서도 사적으로 지정할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고 보고 있는 만큼 내년 하반기 중에 사적 지정 신청을 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최석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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