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은 일부 지역만 집중적으로 할퀴고 지나갔지만, 추수가 시작된 농촌에는 농민들의 한숨이 가득하다. 갈수록 형편없이 떨어지는 쌀값, 농민들에게 풍년이 반가울 리 없다. 정부는 수확기 쌀 생산량이 수요를 넘기면 수급을 조절하고자 예상 초과 공급량을 사들여 시장에서 격리한다. 흉작이면 내다 팔 쌀이 모자라고 풍년이면 쌀값이 떨어지는 일이 반복하는 이른바 '시장격리제'는 농민 생계와 바로 맞닿은 수급 안전장치다. 

쌀 시장격리제도는 지난 2020년 변동직불제가 폐지되면서 도입됐다. 정부는 지금까지 30여 년간 추곡수매가 또는 쌀 목표가격을 설정해 국민의 대의기관인 국회 동의 절차를 거쳤다. 다시 말해 정부가 쌀값을 일정한 수준에서 책임져 왔다는 것이다. 국민의 주식이며 농가소득의 절반 가까이 차지하는 쌀의 중요성과 논 농업의 공익적 기능을 유지 보전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정부의 예산안에는 비룟값 지원과 사료 구매자금 이차보전밖에 없다.

2023년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2023년 정부 예산안은 639조 원이다. 2022년 예산보다 5.4% 증액된 규모다. 이 중 농림축산식품부 예산안은 17조2,785억 원으로 2022년 대비 2.4% 증액됐다. 이는 최근 3년간 농림축산식품부 예산증가율 4.8%의 절반에 불과한 수준이다. 올해 예상되는 물가인상률과 비교해 보면 농림축산식품부 실질 예산은 사실상 삭감됐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수입쌀 예산을 1222억 원 증액했다는 것이다. 국내 쌀값 폭락에는 대책이 없고 수입쌀은 비싸게 사 오겠다는 것이다.

윤석열 정부 출범 후 처음으로 편성한 예산안은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물가 관리가 국가적 과제라 해도 긴축만이 능사가 아니다. 무너지는 농촌, 농민을 살리는 길은 양곡 관리법을 개정하여 생산비가 보장되는 목표가격제를 만들고 거기에 필요한 예산을 확보해야 한다. 이와 함께 생산비 폭등과 높은 이자, 폭락한 쌀가격으로 고통받는 농민에게 생활 안정자금을 지급하는 등의 근본적이고 직접적인 농업예산을 세워야 한다. 농업의 근간을 튼튼히 세우고 농민들이 걱정 없이 농사를 마무리하고 다음 농사를 준비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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