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공단의 기억 (11) 이주 택지로 간 원주민들2

정부, 원주민 취업지원제도 내놨지만
이주 1세대 산단 내 취업길 넓지 않아
기술 인력 유입에 밀려나 단순노무로

택지 받아도 유지 못하는 경우 많아
투기꾼들, 원주민에게 땅 대거 매입해
분양가-시장가 격차로 시세차익 거둬

평화롭게 살던 농민들의 땅에 어느 순간 표시목이 박혔다. 처음에는 논밭이었고 그다음에는 집이었다. 마을 사람들을 그러모아 관청에서 대거리를 해도 부질없었다. 며칠 갇혀 있다 보면 버틸 재간 없이 수용 동의서에 도장을 찍어야 했다. 말뚝이 박힌 곳마다 어김없이 중장비가 들이닥쳤다. 대대로 부쳐 먹던 논마지기든 선조가 잠든 선영(先塋)이든 가리지 않았다. 농민들이 잃은 땅은 삶 그 자체였다. 이들이 고향을 등지고 이주단지로 떠나면서 겪은 고통은 눈부신 도시 발전의 그림자로 남았다.

◇삶터에서 밀려나 삶을 등지다 =  쫓겨나서 도시의 골목에 오줌을 갈기면서 / 개새끼 개새끼 하며 / 고래고래 고함치던 그는 / 쇠를 만지는 기능공도 되지 못하고 / 동전을 세는 구멍가게 주인도 되지 못하고 / 개구리 오줌 같은 보상금으로 / 날마다 술만 퍼 마시는 / 주정뱅이가 되었다…(중략)…돌아가자 돌아가자 밤마다 실성하여 / 홀어미의 애간장을 태우며 / 녹슨 연장의 날을 세우던 그는 / 어느 날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 / 덜컥 눈을 감았다 / 의사는 그가 만성 간암으로 죽었다고 / 사망진단서에 짧게 쓰고 / 우리는 그가 뿌리 뽑힌 / 포도나무 같다고 / 가슴에다 썼다. -고영조 '주정뱅이'-

배운 것이라곤 땅 파는 일밖에 없던 사람들이었다. 헐값에 삶터를 수용당하고 이주단지로 밀려난 원주민 중에는 바뀐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충분하진 못해도 집을 지어 단칸방 월세라도 받을 수 있었더라면 좋았겠지만 그럴 형편조차 안 되는 사람도 있었다. 

고영조(76) 시인은 "이름을 밝힐 순 없지만 귀현리 출신 중에는 이주단지에 정을 붙이지 못하다 정신질환을 얻어 결국 스스로 삶을 뜬 친구도 있었다"라고 조심스레 털어놨다. 

고경수(71) 씨는 "우리는 대원동 이주단지에 땅을 얻어 집을 지었지만 생업이 포도 농사였기 때문에 마산 덕동에 농장 터도 따로 샀었다"라며 "나중에 이를 보고 마을 사람들이 '왜 그때 함께 농사지으면서 살자고 말해주지 않았느냐' 하고 원망 아닌 원망을 하는 이도 있었다"라고 말했다. 

세월이 지나도 도시에 적응하지 못했던 것이다. 평생 농사밖에 몰랐던 세대뿐 아니라 젊은이 중에도 도시에 적응하지 못한 이들이 있었다. 그중 몇몇이 결국 세상을 등졌다는 이야기가 몇 번이나 들려왔다.

1979년 7월 25일자 농토 편입 원주민 실수요자 택지 분양 공고. 3000평 이상 편입됐으면 100평 형 또는 간선도로변 택지, 500평 이상 3000평 미만 편입됐으면 75평 내외의 택지, 300평 이상 500평 미만 편입됐으면 30~40평의 연립택지가 주어졌다.
1979년 7월 25일 자 농토 편입 원주민 실수요자 택지 분양 공고. 3000평 이상 편입됐으면 100평 형 또는 간선도로변 택지, 500평 이상 3000평 미만 편입됐으면 75평 내외의 택지, 300평 이상 500평 미만 편입됐으면 30~40평의 연립택지가 주어졌다. /경상남도창원지구출장소사

◇이주민 생계 대책의 그늘 = 이주단지 주택을 활용한 임대업 외에도 정부가 마련한 공식적인 이주민 생계 대책이 없진 않았다. 산업기지개발촉진법은 이주 대상자들을 위한 구제·지원을 위해 '산업시행자 또는 기지개발지역 안에서 기업을 경영하는 자는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이주자를 타에 우선하여 고용하여야 한다'라는 규정을 뒀다. 

이에 따라 당시 관계기관(마산시·노동청 마산지방사무소·입주업체·창원기계공업공단) 장으로 구성된 '취업대책위원회'가 △이주민 취업 알선 도모 △영농대책 마련 △기지 내 입주 업체 취업 기회 마련 △인허가 우선 △자녀 장학금 지급 △새마을 취로사업 우선 참여와 같은 대책을 내놓기도 했다. 

<창원국가산업단지개발사>는 1975년부터 1988년까지 취업한 이주민을 총 1353명으로 기록한다. 1997년 기준 학비 지원 실적은 중고생 326명(1인당 32만 원), 대학생 70명(1인당 140만 원)이다. 하지만, 실제로 원주민이 산업단지 공장에 취직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대부분 부산기계공고·금오공고 등 전국에서 이름난 기능학교에서 교육받은 인재들이 직능에 맞게 공장을 채웠다. 반면, 자녀 학비 지원 혜택을 본 사람은 꽤 있었다. 

삼동마을 출신 명희찬(65) 씨는 "당시 원주민 공장 취업은 지연이 있다고 하더라도 하늘의 별따기였다"라면서도 "나도 아들 학자금을 지원받은 적이 있고, 당시 이장 업무를 하던 때라 대상 가구들이 상당수 신청했던 기억이 난다"라고 말했다. 

그나마 자녀들은 공단 내 한백직업훈련원에 입학해 취업 길을 여는 사례도 있었다.

부모 세대 취업 알선은 대부분 단순 노무직 중심으로 이뤄졌을 가능성이 크다. 고 시인은 동남공단관리공단에서 근무할 당시를 떠올렸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그런 일이 적었고 1980년대 이후 이주민 생계 대책과 관련된 문제 제기가 나와서 나만 해도 열 명쯤 노무직 취업 알선을 한 기억이 있어요. 농사를 짓던 이전 세대들은 그게 한계인 거고 교육받은 그 자녀 세대가 어떤 형식으로든 능동적인 취업을 했던 거죠. 실제 공장 취업은 기술이 없으면 안 됐습니다. 알선받아 공장을 쓸고 닦는 등 단순 노동을 했던 사례는 '수동적 취업'이라고 해야겠죠."

생계 대책 혜택을 보지 못한 부모 세대들은 일거리를 찾아 헤맸다. 도희주(56) 동화작가의 아버지는 뺑소니를 당해 불편한 다리를 끌고 ㈜한화 산업폐기물 분리장에서 일했다. 어머니는 공공근로 일자리를 찾아다니며 창원 시내 잔디밭이란 잔디밭은 다 메웠다. 산업도시로 변해가는 창원에서 땅의 원래 주인들이 할 수 있었던 경제활동이란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경남신문이 1980년 1월 11일자에서 원주민 취업 대책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고 보도했다. 당시 경상남도창원출장소는 이주민들에게 구호 양곡을 세대당  219㎏을 지급하기로 했지만 취업 연계는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 /경남신문
경남신문이 1980년 1월 11일 자에서 원주민 취업 대책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고 보도했다. 당시 경상남도창원출장소는 이주민들에게 구호 양곡을 세대당 219㎏을 지급하기로 했지만 취업 연계는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 /경남신문

◇정착 못 하고 투기꾼에 집터 넘긴 사정 = 원주민들 처지에서 도시로 몰려든 노동자들에게 월세방이라도 내주려면 일단 집을 올려야 했다. 하지만, 기존 재산에 받은 보상금을 모두 합쳐도 그만한 돈이 안 되는 경우가 있었다. 소작을 지으면서 살았거나 원래 농사짓던 땅이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이 그랬다. 

용지마을 출신 김중화(78) 씨는 "맨땅이나 골조만 있는 이주단지에 집을 올리려면 평당 30만 원이 들었는데 집터 60평이면 1800만 원"이라며 "예를 들어 20마지기(약 3000평) 농사짓던 사람들은 대지 사고 건물 올리면 빚만 남았다"라고 말했다. 

이들은 모두 생계 수단이 없어 국수로 연명해야 했다. 봉곡동 출신 이강원(85) 씨처럼 당장 집을 모두 올릴 돈이 없어 몇 년 동안 조금씩 증축했던 사례도 흔하다.

<경상남도창원지구출장소사>는 1978년 11월께 건축 자잿값이 15% 이상 급등해 원주민들이 이주단지 주택 건립에 어려움을 겪은 정황을 기록하고 있다. 이주단지 집터 분양이 4~6개월 미뤄지자 형편이 어려운 원주민 중에는 집을 짓기보다 땅을 전매하는 사람이 많았다. 1970년대 후반 창원 배후도시 개발이 본격화하자 전국에서 투기꾼이 몰려들어서다. 당시 출장소는 이주민들에게 원가 100만 원짜리 집터 60평을 24만 원에 분양했는데, 투기꾼들은 그 차액을 노렸다. 1979년 출장소가 '택지 분양 후 1개월 이내에 건물을 착공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세우자 이런 현상은 더욱 가속화했다. 원주민들은 당시 당장 600만~800만 원의 건축비를 마련하지 못해 투기꾼에게 땅을 넘겼고 출장소와 세무 당국은 한동안 속수무책이었다.

당시 대지종합기술공사 직원으로 창원시 도시설계를 위해 파견 나와 있던 윤재필(72) 시인은 그때 투기 광풍을 똑똑히 기억한다. 윤 시인은 "1·2·3차에 걸쳐 차례로 토지를 수용하고 이주가 진행됐는데, 그때마다 서울에서 내려온 투기꾼들이 빗자루로 토지를 쓸어 담듯 했다"라며 "보상받은 이주민의 30~40%는 투기꾼에게 넘겼을 것으로 추정한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개발은 확정적인데 투기꾼이 모두 쓸어가 물건이 없으니, 한때는 땅값이 원가의 4배까지 뛰기도 했다"라며 "투기 광풍 속에 이주단지에 정착하지 못한 원주민들은 없어진 고향을 그리면서 도시 빈민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라고 말했다.

/이창우 강찬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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