뚫으려는 연합군, 지키려는 일본군 전투 치열
'일본군 진출입 요새' 놓고 양군 모두 큰 피해

1597년 가을, 일본군은 명량해전과 직산전투에서 패했다. 비록 치명적일 정도는 아니었지만, 일본군의 전쟁 의지를 꺾기에는 충분했다. 실익도 없는 전쟁에 염증이 난 일본군 지휘부는 한반도 동남해안 일대에 쌓은 왜성으로 철군했다. 이렇게 7년 전쟁은 지지부진한 형국으로 이어졌다. 조선과 명나라 입장에서는 더는 이 전쟁을 끌 수 없었다. 언제 일본군이 다시 병력을 보충해 진격해 올지 모르는 일이었고, 특히 명나라는 국력이 쇠락해 가는 과정에서 7년 전쟁으로 너무 큰 비용과 병력을 소모하고 있었다.

◇진주성과 반대 상황 '울산왜성 전투' = 명나라 총사령관 양호는 뭔가 한 곳에 병력을 집중해 일본군에 치명타를 날리고 싶었다. 조선과 명나라군은 일본군에 가장 큰 치명타를 줄 수 있는 전략적 거점으로 울산왜성을 선택했다. 울산왜성은 현재 울산시 학성공원 일대로 당시에는 도산(島山)이라는 나지막한 산이었다. 도산 남쪽으로는 당시 바닷물이 들어와 바다를 오가기 편했으며, 주변에 여러 산이 있어 방어하기 쉬웠다. 가토 기요마사는 서생포 왜성에서 나와 이곳을 전진 기지로 삼고 1597년 가을, 울산왜성을 쌓았다.

일본인이 그린 울산왜성 전투 모습. 성이 완벽하게 포위돼 있다. /울산박물관
일본인이 그린 울산왜성 전투 모습. 성이 완벽하게 포위돼 있다. /울산박물관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이하 '연합군')은 마치 일본군이 진주성을 공격하듯이, 동원 가능한 전 병력을 끌어모았다. 그렇게 명나라군 3만~4만 명과 권율이 이끄는 조선군 1만~1만 3000명을 모아 대략 5만 대군을 형성했다. 병력을 모은 연합군은 서두르지 않았다. 경주성을 거점으로 삼아 보급 물자를 충분히 확보했다. 그리고 울산왜성에 정보원을 잠입시켜 왜성 내 일본군 배치 등을 파악했다. 일본군 지원 부대가 올 만한 길목은 미리 막아두었다. 모든 준비가 끝난 조선·명나라 연합군은 1597년 음력 12월 23일 울산왜성으로 진격을 시작했다. 연합군은 울산왜성을 외곽에서 지원하던 병영성과 언양성을 순식간에 함락했으며, 울산왜성 외곽 목책을 점령했다. 연합군은 완벽한 포위망을 구축했으며, 울산왜성은 고립되었다. 

물론 가토 기요마사도 대비는 하고 있었다. 울산왜성이 지어진 도산은 해발 50m 내외의 구릉이지만 지형을 잘 활용해서 높이만 10m가 넘는 성벽을 쌓았고, 3중으로 성벽을 구성해 방어력을 극도로 높였다. 성벽은 대포에 허물어지지 않도록 안쪽 면은 흙을 다져 기초를 쌓고 바깥쪽은 돌로 쌓았다. 하지만 막 쌓은 성이었기 때문에 우물을 미처 팔 시간도 없이 연합군이 닥쳤다. 

만약 연합군이 울산왜성을 점령한다면, 일본군 본진인 부산으로 가는 길이 열리는 것이었다. 마치 조선에 진주성이 전라도로 진출하는 입구이듯이 울산왜성도 일본군으로서는 물러설 수 없는 곳이었다. 

◇연합군, 울산왜성 전투서 결국 패배 = 울산왜성을 완전히 고립시키는데 성공한 연합군은 이제 성을 직접 공격하기에 나섰다. 그러나 일본군이 쌓은 왜성이 연합군 처지에서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었다. 그 이전까지는 조선이 쌓은 성을 일본군이 점령하고, 그 성을 탈환하기 위한 전투였을 뿐, 일본이 직접 쌓은 성을 상대해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일본군은 전국시대 100년이 넘는 기간 수많은 전투를 통해 최소한의 병력으로 최대한의 방어력을 확보하는 효율적인 축성법을 익혔다. 성벽 자체도 높을뿐더러 성벽 위에는 마치 집과 같은 누각이 있어 병사들은 따뜻하고 안전한 곳에서 조총과 활을 쏠 수 있었으며, 적군이 성벽을 넘는다 하더라도 또다시 성벽이 나타나고, 설령 성을 점령당했다 하더라도 한 부분만 허용되게 성을 지었다. 그리하여 적군이 한 번 성벽을 넘거나, 성문을 돌파하면 끝장인 조선과 중국성과는 달리 왜성은 성이 뚫려도 공격 측에서는 끝없이 전투해야만 했다.

울산왜성 전투도(성벽 부분). /위키백과
울산왜성 전투도(성벽 부분). /위키백과

이러한 왜성을 처음 상대해 본 연합군은 공격하는 족족 일본군의 거센 반격에 휘말려 적지 않은 병력 피해를 봐야만 했다. 조선군 사령관인 권율 또한 성벽을 공격하다 큰 피해를 보았다. 결국 연합군 총사령관인 양호는 성벽 공격을 중단하고, 성 주변의 모든 물길을 끊고 성을 말려 죽이는 전술을 택했다.

일본군은 물을 확보하기 위해 태화강 지류와 남쪽 바다로 병력을 내보냈으나 족족 연합군에게 걸려 참패했다. 결국 울산왜성에서는 물이 떨어져 말의 피를 먹고, 자신의 오줌을 받아먹고, 사령관인 가토 기요마사 자신도 헝겊에 젖은 물을 짜 먹는 사태에 이르게 된다. 물 외에도 군량이 모자라 담벼락 흙을 빗물에 풀어 마실 때도 있었고, 성벽 위의 병사들은 하루에 한 홉의 쌀을 급식받았으나 이마저도 물이 없어 생쌀을 씹어먹어야 했다.

공격이 시작된 지 8일째인 음력 12월 30일, 연합군은 일본군 포로를 통해 성내 상황을 알 수 있었다. 일본군 포로는 "울산왜성에 수비 병력은 1만 명 되지만, 굶주림으로 싸울 수 있는 병력은 1000명밖에 되지 않는다"고 전했다. 이에 연합군은 마지막 공격을 가하려 했으나 이 무렵, 일본 지원군이 속속 도착하였다. 

일본군은 울산왜성 상황을 그대로 보고만 있지 않았다. 전투 초기부터 일본은 지원군을 꾸준히 파견했다. 물론 초기에는 연합군에 의해 지원군이 패배했지만 점점 지원군은 늘어나 최종적으로는 근 6만 명에 이르는 일본군이 울산왜성을 구원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연합군은 일본군 지원군을 막지 못했다. 결국 1598년 음력 1월 4일, 연합군은 울산왜성의 포위를 풀고 물러났다. 이 과정에서 연합군은 일본군의 추격으로 적지 않은 피해를 봤다.

연합군의 울산왜성 전투 패배는 큰 타격이었다. 이제 연합군은 공세를 취해 일본군을 밀어내야 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울산왜성 전투에서 5만 명이 넘는 연합군이 1만 명이 조금 넘는 일본군을 무너뜨리지 못했다는 점은 연합군의 입장에서는 난감한 일이었다. 도대체 이 전쟁을 언제까지 해야 하는가 회의감이 드는 상황이었다. 물론 일본군 처지에서도 이 전투는 충격이었다. 연합군의 주도면밀한 전술에 말려 적지 않은 피해를 봤고 전쟁이 지속될수록 조선과 명나라 군도 전투력이 점점 상승하는 것을 일본군도 느낄 수 있었다.

가토 기요마사는 전투 직후 서생포 왜성으로 진영을 후퇴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상황을 설명했지만, 히데요시는 재차 공세 명령을 내렸다. 할 수 없이 가토 기요마사는 다시금 울산왜성에 진영을 꾸릴 수밖에 없었다.

울산왜성이 있던 지금의 학성공원 전경. /울산 중구청
울산왜성이 있던 지금의 학성공원 전경. /울산 중구청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 = 이제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일본군 지휘부는 전쟁을 더 이상 원하지 않았다. 일본으로 퇴각을 원했다. 일본군의 힘으로는 명나라는커녕 조선도 점령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해지고 있었다. 쇠락해가는 명나라 또한 이 전쟁에서 더 시간을 끌 수 없었다. 철벽에 가까운 왜성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을 몰아낼 힘도 없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대치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결국 연합군이 다시 칼을 빼 들었다. 조선과 명나라는 전 병력을 동원해 4개 방면에서 일본군을 동시에 공격해 몰아내는 소위 '사로병진책'을 구상했다.

먼저 동로군은 경주에서 출발해 울산왜성을 공격하고, 부산으로 향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중로군은 진주에서 출발해 사천왜성을 공격하고 성공할 경우 고성과 창원으로 진격해 일본군을 몰아내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서로군은 전주를 거쳐 순천왜성을 공격해 고니시가 이끄는 일본군을 바다로 몰아내고, 마지막으로 조명 연합군 수군은 바다로 내몰린 일본군을 쳐부순다는 전략이었다. 연합군 동원 인력만 10만 명이 넘는 대규모 작전이었다. 작전 일은 1598년 음력 10월 초순~중순으로 4곳(울산왜성, 사천왜성, 순천왜성, 남해안)에서 동시에 대규모 전투를 벌여 일본군을 몰아낸다는 작전이었다.

사로병진책이 추진될 무렵, 1598년 음력 8월 18일, 7년 전쟁을 이끌어 온 일본 관백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했다. 히데요시는 죽기 전 경쟁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 일본 내 대표적인 다이묘(영주) 5명을 불러 늦둥이 아들인 도요토미 히데요리에게 충성을 맹세케 한 후 숨을 거뒀다. 히데요시가 죽은 직후 영주들은 조선에 출병한 일본군의 철수를 결정하였다. 드디어 전쟁의 끝이 보이는 순간이었다. 

/임종금 시민기자(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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