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이후 3년마다 독창회
모교 경남대서는 후학 양성
밀양오페라단 창단하고 이끌어
"성악, 대중과 더 가까워졌으면"

경남대 사범대 음악교육과 부교수로 재직 중인 이종훈(50) 바리톤 성악가를 보면 노력도 노력이지만 타고나는 것도 있어야 사람이 예술이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공연을 처음 접한 것은 2017년 1월 경남뮤지컬단의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였다. 그는 이 뮤지컬에서 폰트랩 대령 역할을 맡았다. 그해 9월에는 밀양오페라단의 모차르트 오페라 '마술피리'를 볼 때 다시 그를 만났다. 그는 이 작품에서 총 제작 및 감독, 그리고 익살스러운 캐릭터의 파파게노 역을 맡아 활약을 펼쳤다. 이후 몇몇 그의 독창회와 오페라 공연을 봤던 터였다.

오랜만에 그를 다시 상기하게 된 것은 지난번 '사람이 예술이다'(26)에 소개됐던 조미숙 경남프리모앙상블 음악감독을 통해서다. 인터뷰 중에 그 중창단의 초창기 구성원 중에 경남대 이종훈 교수가 있다는 얘길 들으면서 귀가 솔깃해졌다. 여러 차례 그의 공연을 보았고 또한 인사도 나누었던 터라 좀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자 지난 12일 경남대 예술관에 있는 그의 연구실을 찾았다.

이종훈 경남대 사범대 음악교육과 교수가 그의 연구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정현수 기자

연구실 한쪽 선반 위에 '바리톤 이종훈 귀국 독창회' 포스트가 액자로 만들어져 놓여 있다. 2005년 11월 28일 오후 7시 30분이라고 적힌 것까지 보인다. 그의 독창회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2018년 3월 마산 3.15아트센터 소극장에서였다. 그때가 8회 독창회였다.

"이탈리아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면서 독창회를 열었는데, 그때 3년에 한 번씩은 독창회를 갖기로 스스로 다짐한 게 있어서 지금까지 3년 주기로 이어오고 있습니다." 성악가에게 독창회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온전히 홀로 자신의 작품을 발표하는 것이기 때문에 준비 과정이 길기도 하지만 엄청난 노력도 뒤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학 교수라는 직분이다 보니 학교의 위상이 걸려 있어 여간 신경 쓰이지 않는다고 한다.

"교수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학교의 이름을 걸고 하는 거잖아요. 물론 그런 차원에서 자긍심도 있겠지만 한순간 실수라도 한다면 학교 이미지, 제자들의 인식, 나와 관련된 예술단체들의 처지 등 모든 것이 한방에 날아갈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죠. 그래서 독창회는 예사로 준비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독창회는 대개 1년 전부터 준비한단다. 선곡은 주로 정통 클래식 곡으로 한다. 아무래도 클래식 성악을 가르치는 교수다 보니 이런 과정을 통해 연구하고 또 연구한 것을 학생들에게 전하는 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처음부터 정통 클래식을 좋아하였을까.

"전 어렸을 때 트로트를 좋아했어요. 중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께서, 그 선생님은 과학 과목이었어요. 어느 날 나보고 음악 티켓을 주었어요. 밀양체육관에서 하는 학생음악회였는데, 거기서 어떤 여학생이 성악을 하는데 처음 색다른 음악을 접하고 뿅 갔죠."

그가 클래식 음악을 듣고 뽕 간 이유는 여학생 혼자 수백의 관중 앞에서 노래하는 대담함과 트로트와는 전혀 다른 선율과 음악적 표현이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런 감동도 잠시 다시 그의 주변을 맴도는 음악은 여전히 트로트였다. 그가 성악에 소질을 발견한 것은 고등학교 때였다.

2021년 5월 마산 3.15아트센터 소극장에서 디어마이프렌즈와 함께 공연하는 장면./이종훈
2021년 5월 마산 3.15아트센터 소극장에서 디어마이프렌즈와 함께 공연하는 장면./이종훈

"고등학교 음악 시간에 알았어요. 내게 노래 소질이 있다는 것을요. 제대로 배우고 그런 적도 없는데, 음악을 한 번 들으면 그 선율이 뚜렷하게 기억되어서 연습하지 않아도 그 노래를 바로 부를 수 있는 정도였어요."

그래서 음악 선생님은 이 교수에게 노래 선창을 시키고 다른 아이들이 따라부르게끔 했단다. 순간적으로 영화 <파파로티>가 떠올랐다. 절대적 음감의 소유자, 한 번 들으면 그 긴 아리아도 시원하게 소화해내는 능력자.

"그때 알았어요. 중학교 때 음악회에서 들었던 노래가 이거였구나 했죠. 그때 소질을 발견한 거예요. 노래로 대학을 가야겠다 목표를 정하고 선배와 선생님을 찾아다니며 어떻게 하면 성악으로 대학에 갈 수 있는지 물어보고 준비했어요."

성악으로 대학에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집은 밀양인데, 밀양에서 성악을 개인 지도하는 사람이 없어 마산까지 오고 가야 했다.

"레슨을 받고 집에 도착하면 항상 새벽이었어요. 그래서 집에 들어가는 차가 없어서 논길 사이를 걸어가면서 보리피리를 만들어 불기도 하고 배웠던 노래 부르기도 하면서 걸어 다녔어요."

그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이 교수는 다시 트로트밖에 몰랐던 초등학교 시절을 떠올린다. 

"초등학교 4, 5학년 때인가 우리 마을에 콩쿠르 대회가 있었어요. 외부의 밴드하는 분들이 설이나 명절 때 마을에 초청되어 와서 행사를 했는데, 대개 어른들이 나가서 노래 부르고 하잖아요? 그런데 어린 제가 거기에 나갔어요. 대상 먹었죠. 그때 불렀던 노래가 '사랑은 얄미운 나비인가봐'였어요."

그러고 보니 트로트 신동이 성악 신동으로 거듭난 모습이겠다. 그때 대상 먹은 상품으로 전기 약탕기를 받아 어머니께 드렸는데, 당시엔 처음 보는 물건이라 아주 좋아하셨다고. 집안에 노래를 잘하는 사람이 없다는데 이 교수에게 그런 소질이 있다는 것을 보면, 분명 그 역시 돌연변이다. 그때부터 동네에서 꽹과리도 치고 차전놀이에도 들어가고 했으니 끼도 넘쳤을 듯 싶다.

밀양오페라단이 2017년 9월 밀양아리랑아트센터 대공연장에서 징슈필 오페라 모차르트의 '마술피리'를 공연한 장면./이종훈
밀양오페라단이 2017년 9월 밀양아리랑아트센터 대공연장에서 징슈필 오페라 모차르트의 '마술피리'를 공연한 장면./이종훈

"아버지는 노래를 종종 흥얼거리셨고 제 목소리는 어머니를 닮은 것 같아요." 그게 그가 받은 재능, 한 번 들은 선율을 모두 기억할 수 있는 능력을 설명할 수 있지는 않다.

이 교수는 그렇게 마산을 오가며 개인 교습을 한 끝에 1991년 경남대 사범대 음악교육과에 들어갔다. 남 앞에 섰을 때 부끄러움을 안 타는 훈련을 위해 학내 풍물패도 기웃거려 보고 응원단도 경험했다. 이종훈과 응원단, 사실 연결하기 쉽지 않은 이미지라 의외다. 응원단은 2학년 군대 들어가기 전까지 했다. 군은 전공을 살리려고 육사 군악대에 갔는데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나 보다. 복학하고 3학년 발표회 때 연습한 곡을 부르는 데 세 번이나 틀리는 바람에 교수에게 심한 꾸지람을 들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그의 와신상담이 시작됐다. 학교 근처로 방을 옮기고 머리마저 삭발하고 학교를 다녔다. 그 때문에 '이상한 놈'으로 찍혀 여러 오해를 받았다고. 하여튼 그때부터 학교 예술관 연습실에만 처박혀 살았다. 그런 노력 덕에 실기 장학생이 되었고, 급기야 계명대 대학원에  성악 과정을 마치게 되고 이탈리아로 유학까지 떠나게 됐다. 이탈리아에서 여러 콩쿠르에서 입상하기도 하며 성악 정규 과정을 마쳤다. 이탈리아에 머물 수도 있었지만, 한국으로 돌아왔다.

2005년 한국으로 돌아와서 첫 귀국 독창회를 갖고 활동하다 2013년 경남대 모교 교수로 부임하면서 더욱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그에겐 성악이 좀 더 대중과 가까워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밀양오페라단을 만든 이유도 그 때문이다. 2007년 3~4명 단원으로 창단된 밀양오페라단이 매년 정기 공연을 비롯해 활발한 활동으로 이제 밀양아리랑아트센터 무대 작품도 얼마든지 소화할 만큼 규모를 갖추게 됐다. 교수로서 또는 성악 무대에서, 예술이 된 한 사람으로서 더욱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길 기대한다. 

/정현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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