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데요시 죽고 일본군 철수에
연합군 '사로병진책' 총공세
육상 공격 연달아 패해 무위로
이순신 노량전투서 끝내 순국

1598년 초, 조선·명나라 연합군(이하 '연합군')은 큰 곤경에 빠져 있었다. 전력을 기울인 울산왜성 전투에서 1/3도 안 되는 일본군 병력에 패배했고, 일본이 쌓은 왜성의 엄청난 방어력을 실감했다. 하지만 이대로 전쟁이 무한정 지속되게 지켜볼 수 없던 명나라는 4로병진책으로 병력을 총동원해 모든 전선에서 한 번에 일본군을 밀어내는 전략을 세운다. 한편, 1598년 8월, 7년 전쟁을 일으키고, 수많은 반대에도 전쟁을 이어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했다.

◇완전히 실패한 4로병진책 = 연합군은 한반도 동남해안에 진을 치고 버티고 있는 일본군을 완전히 몰아내기 위해 전 병력을 4개 진영(동로군, 중로군, 서로군, 연합 수군)으로 나누고, 일본군 거점을 동시에 공격하기로 했다. 작전 일시는 1598년 음력 9월 20일이었다.

명나라는 4로병진책 수행을 위해 기존 조선에 파병된 6만 6000명 외에도 추가로 수군과 육군 등 1만 3000명 이상을 파병했다. 그리고 9월 말까지 조선이 준비한 군량 20만 석 외에 명나라도 약 22만 석을 운반해왔다. 그야말로 국력을 기울인 승부수였다.

1598년 음력 9월 20일 연합군 중로군은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가 지키고 있는 사천 방면으로 진격했다. 연합군 병력은 약 4만 명에 달했고, 시마즈 요시히로 병력은 불과 7000~8000명에 불과했다. 연합군이 진격해오자 시마즈 요시히로는 진주와 곤양지역에 있는 병력을 후퇴시키고 사천 선진리왜성과 사천고성(사천읍성)에 병력을 집중했다. 음력 9월 28일, 경상우병사 정기룡 등이 사천고성을 기습 점령하였고, 시마즈 요시히로 부대의 거점인 선진리왜성만 남았다. 

명나라 황실 화가가 그린 정왜기공도병. 오른쪽 상단은 순천 왜교성을 포위한 연합군 수군 모습. /국립중앙박물관
명나라 황실 화가가 그린 정왜기공도병. 오른쪽 상단은 순천 왜교성을 포위한 연합군 수군 모습. /국립중앙박물관

하지만 일본군 중에서도 최강의 전투력을 자랑하는 시마즈 요시히로 부대는 연합군 공세에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연합군 식량 창고를 불태워 버렸으며, 부족한 병력임에도 일부는 성밖에 주둔하면서 연합군의 후미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조급해진 명나라 제독 동일원(董一元)은 10월 1일 총공격을 명했으나, 공격 도중 화약 더미가 폭발하자 연합군 병사들은 우왕좌왕했다. 그 틈을 타고 시마즈 요시히로 부대가 연합군을 급습 하였다. 이에 제독 동일원은 퇴각을 명령했고, 명나라군은 그간 모아뒀던 무기와 보급품 등을 모두 내버리고 도주했다. 또한 사천까지 진격하는 과정에서 설치했던 망진채·영춘채도 스스로 파괴해 버렸다. 이는 일본군을 견제할 최소한의 장치조차 없앤 것으로 얼마나 연합군이 당황했는가를 보여준다. 사천 전투에서 연합군은 7000~8000명이 죽은 반면, 시마즈 요시히로 부대는 수많은 물자를 획득했다.

연합군 동로군은 1598년 음력 9월 22일 울산왜성으로 향했다. 명나라 제독 마귀(麻貴)가 이끄는 명나라 군 2만 4000명과 김응서가 5500명을 이끌고 합류했다. 이 당시 김응서 휘하에는 일본군이었다가 조선군에 투항한 김충선이 이끄는 항왜 병사들도 있었다. 연합군은 울산왜성뿐 아니라 동래 지역까지 진출해 일본군과 교전을 벌이는 등 치열한 전투를 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에 포로로 잡혀 있던 조선인 1100명을 구출하는 성과도 있었지만, 끝내 목표했던 울산왜성을 점령하지는 못하고 9월 25일 퇴각하고 말았다.

사로병진책 개념도. /경남도
사로병진책 개념도. /경남도

연합군 서로군 3만 6000명은 명나라 제독 유정(劉綎) 지휘 하에 순천 왜교성에 이르렀다. 그리고 연합군 수군은 이순신과 명나라 수군 제독 진린의 지휘 하에 광양만을 완전히 포위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그야말로 독 안의 쥐가 된 셈이었다. 수군은 왜교성 동쪽인 장도(獐島)를 공격해 조선인 포로와 일본군이 남겨 놓은 군량을 획득하는 등 성과를 냈지만, 유정이 지휘하는 육군은 전투를 거의 하지 않았다. 이에 이순신과 진린의 거듭된 독촉으로, 유정은 1598년 음력 10월 3일 육군과 수군이 왜교성을 총공격하기로 약속했다. 연합군 수군은 약속대로 10월 3일 총공세를 가했고, 명나라 수군은 수십 척의 전선이 파괴되는 피해까지 봤으나, 유정은 끝내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연합군이 야심 차게 준비한 4로병진책은 별 성과 없이 끝나고 말았다.

◇노량해전과 이순신의 죽음 = 4로병진책이 한창 준비되고 있을 무렵, 1598년 8월 말 전라병사 이광악은 석방된 조선인 포로들을 통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조정에 알렸다. 명나라는 일본군이 퇴각하리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유정 등 일부 명나라 지휘관들은 일본군에 뇌물을 받고 어차피 끝날 전쟁이기 때문에 전투에 적극적으로 임하지 않았다. 심지어 고니시는 이순신에게도 뇌물을 바치려 하였다.

하지만 조선의 처지에서는 국토를 짓밟은 일본군을 이대로 곱게 돌려보낼 수 없었다. 이들이 언제 다시 침략해 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명나라 수군 제독 진린을 설득해 여전히 광양만을 완전히 포위하고 있었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순천 방면 일본군은 철군하고 싶어도 바다가 막혔기 때문에 철군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1598년 음력 11월 17일경, 고니시 유키나가는 진린에게 막대한 뇌물을 바친 끝에 연락선이 포위망을 뚫고 나갈 수 있게 했다. 이 연락선은 남해도와 사천·고성 등 일본군이 주둔한 곳을 돌면서 고니시에 대한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사천 선진리왜성에 있던 시마즈 요시히로와 남해도에 주둔 중인 소 요시토시(宗義智), 고성에 주둔 중인 다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宗茂) 등은 전선 500척을 보내 고니시를 구원하도록 했다. 만약 구원 병력이 닥치면 이순신과 연합군 수군은 꼼짝없이 앞뒤로 포위될 처지에 놓였다.

이순신 장군이 죽음을 맞이한 남해군 고현면 관음포만 일대. 현재 이순신 순국공원이 들어서 있다. /남해군
이순신 장군이 죽음을 맞이한 남해군 고현면 관음포만 일대. 현재 이순신 순국공원이 들어서 있다. /남해군

다행히도 이순신은 이미 구원 병력을 예측하고 그들이 몰려오는 노량해협으로 재빨리 수군을 이동시켰다. 1598년 음력 11월 18일 오전, 일본군 구원군은 노량해협 길목을 지키고 있는 연합군 수군에 막혀 200척이 침몰하고 150척이 파손되는 등 큰 피해를 봤다. 구원군 중 일부는 당황한 나머지 남해도 서북쪽 관음포로 향했다. 관음포는 입구가 매우 넓은 포구로 당시에는 지금보다 훨씬 넓었다. 따라서 자칫하면 먼 바다로 빠져나가는 곳으로 오인할 수 있다.

이에 이순신은 직할 함대만을 이끌고 관음포로 가서 입구를 막았다. 이렇게 되자 관음포에 갇힌 일본군은 포위를 뚫기 위해 필사적으로 조선 수군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면서 이순신과 조선 수군이 꺼리던 근접전이 이어졌다. 이때 이순신은 맨 선두에 나서 직접 북을 울리며 전투를 독려하고 있었다. 정오 무렵, 이순신이 일본군이 쏜 탄환에 쓰러졌다. 이순신은 "지금 싸움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고 한다. 이날 이순신 외에도 가리포 첨사 이영남, 명나라 수군 이인자인 등자룡(鄧子龍)이 사망했다.

◇일본군 철수와 전쟁 마무리 = 이순신과 연합군 수군이 노량해협으로 옮긴 사이, 고니시가 이끄는 순천 방면 일본군은 왜교성에서 나와 일본으로 철수했다. 이 외에도 울산 서생포 왜성에 있던 가토 부대, 부산에 있던 일본군 본대도 일본으로 철수했다.

하지만 일부 일본군은 여전히 남해도에 남아 있었다. 이들은 노량해전 당시 고니시를 구원하려다 대패하고 남해도에 급히 상륙한 일부 병력과 노량해전 패배로 미처 철군하지 못한 남해도 주둔 병력이었다. 

노량해전 3일 후인 1598년 음력 11월 21일, 연합군은 남해도에 상륙해 잔여 일본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때 약 1000명에 달하는 일본군이 궤멸하면서 11월 24일 전투는 끝났다. 고니시와의 전투를 끝끝내 피하던 명나라 제독 유정은 남해도 전투에서는 성과를 올리기 위해 민가에 불을 지르고 조선인 포로와 남해도 주민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7년 전쟁은 이렇게 끝났다. 하지만 이 전쟁은 조선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고, 쇠락해가고 있던 명나라도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전쟁의 주 무대가 된 경남지역은 너무나 큰 상처를 입었다. 

/임종금 시민기자(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관련기사

관련기사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