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국악인 구술채록집 24집
60여 년 국악 인생 고스란히
국악사 빈틈 메우는 증언록
미숙.윤영.순자 여러 이름과
'영송당' 호 얻게 된 사연 등
조 명인 개인 이야기도 담겨

국가무형문화재 가곡 예능보유자이자 마산회원구 가곡전수관 관장인 조순자(79) 명인이 국립국악원에서 발간하는 구술총서 24집에 실렸다.

국립국악원의 구술총서는 근·현대 국악사 정립을 위해 악·가·무를 포괄하는 국악계 전반의 원로예술가에 대한 구술채록 사업으로 발간하는 것인데, 2009년 시작했으며 이번에 23집과 24집을 발간했다. 23집은 처용무 보유자 김중섭 명인이 소개됐다. 

구술총서는 문헌사에 담기지 않은 예술가 개인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그렇지만 원로국악인들의 이면사는 당대 국악사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자료가 되기도 한다. 이 책은 261쪽 분량의 비매품으로 전국 주요 도서관에 배포되고 국립국악원 누리집(gugak.go.kr)에서도 볼 수 있다.

조순자 가곡예능보유자가 지난 2일 가곡전수관 나눔실에서 국립국악원이 발간한 구술총서 24권을 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정현수 기자
조순자 가곡예능보유자가 지난 2일 가곡전수관 나눔실에서 국립국악원이 발간한 구술총서 24권을 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정현수 기자

조순자 명인이 국립국악원 구술총서에 담기게 된 이유는 책 발간사에 밝혀져 있다. "국가무형문화재 가곡 보유자로서 국내 최초로 가곡전수관을 설립해 후학을 양성하고 (…) 1958년 KBS서울중앙방송의 국악연구생 2기생으로 선발되면서 국악에 입문 (…) 국립국악원에서 이주환 선생을 만나 가곡·가사·시조 등을 전수했고, 6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갈고 닦은 가곡을 통해 수많은 제자를 양성해 (…) 1985년 KBS 국악대상을 비롯해 1992년 경남예술인상과 2022년 11월 가곡 분야에서는 처음으로 제29회 방일영 국악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책에는 지난해 10월 12일 가곡전수관에서 조 명인이 윤중강 국악평론가와 인터뷰하며 오간 이야기가 그대로 실렸다. 두 사람의 대화만으로는 상황을 알기 어려운 경우에는 주석을 달아 설명을 덧붙였다.

책 구성은 1장 국악 입문과 국악연구생 시절 이야기부터 2장 국악연구생 시절 해외 공연과 마산에서의 국악 교육 시기, 3장 영송헌과 그동안의 회고, 4장 못다 한 이야기로 이루어졌다.

책 속으로 들어가면, 우선 조 명인이 '영송당'이라는 호를 얻게 된 사연이 눈길을 끈다. "교원대 대학원생들과 학부생들이 제 강의와 가곡이 좋았던지 홈페이지를 만들었어요. 그때 그 역할을 하던 대학원생과 조규익 교수님이 친분이 있어 그 홈페이지에 '영송헌 송'이라는 시를 첫 페이지에 실어주셨는데, 그 시의 내용이, 제 노랫소리가 솔바람 소리처럼 들려 노래 공부하는 곳이 큰 소나무 아래에 모여 함께하니 그곳을 영송헌, 그 영송헌을 지킬 지킴이라고 영송당이라 부르겠다는 부언을 달아 영송헌 송을 지어주신 것에 고마워 '영송당'이라는 호를 즐겨 쓰고 있답니다." 그래서 2010년 가곡전수관에 연주홀이 지어졌을 때 그곳 이름을 '영송헌'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두 사람의 대담을 듣는 듯한 기분으로 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면 자연스레 조 명인의 예술철학도 접하게 된다. "외세가 들어오면서 우리의 전통이 위축되면서, 폄하되거나 왜곡된 것이 많아서 슬퍼요. 음양오행적인 철학 등이 바로서야, 이제 비로소 우리 전통 음악도 바로 설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23쪽)

운니동 98번지 옛 국립국악원 시절의 조순자 선생, 왼쪽은 검무 추는 모습이고 오른쪽은 소고춤을 강선자(오른쪽)와 함께 추던 시절의 모습이다-170쪽./책갈무리
운니동 98번지 옛 국립국악원 시절의 조순자 선생, 왼쪽은 검무 추는 모습이고 오른쪽은 소고춤을 강선자(오른쪽)와 함께 추던 시절의 모습이다.(170쪽) /책갈무리

역시 마찬가지로 조 명인이 남녀평등 문제에 얼마나 민감했는지 읽을 수 있는 대목을 만나기도 한다. 여성국극에서 남자 역할을 했던 조금앵, 김경애 이야기가 나오면서다. 윤 평론가가 "그런 남자 역할을 하는 사람을 볼 적에 선생님이 멋지다고 생각을?" 했느냐고 묻자 조 명인은 "남자가 되고 싶었으니까"하고 말했다. 이유가 이어진다. "왜냐하면 뭘 잘해도 남자와 여자가 있으면 남자를 앞에 세우고 여자는 뒤에 세우고 이랬잖아요."

조 명인이 경서도 소리 명창이자 배뱅이굿의 이은관 명인과 함께 활동했다는 사실은 호기심을 자아내게 한다. "이은관 선생님하고는 제가 학원도 같이 했어요. 세운상가(서울시 종로구) 있죠. 거기에 그 옆 건물에 보리수 다방 2층에서…. 거기서 '이은관, 조윤영 연구소'라 해가지고 그 시절 김뻑국(본명 김진환)이 자주 왔었어요." 김뻑국은 재담가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주인공이다. 그런데 여기서 '조윤영'이라는 이름이 등장하는데, 이는 조순자 명인의 다른 이름이다. "조윤영! 내가 이름이 몇 가지인지 몰라. 순자가 싫어서…."(46쪽)

그땐 그랬다고 한다. 일본식 이름 '자(子)'가 들어가는 게 싫어서. 조 명인은 이 부분에 대해 한 마디 덧붙인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진 이름이 미숙이였어요."

조 명인이 어떻게 가곡을 하게 되었는지도 알 수 있는 대목이 있어 눈여겨 보게 된다. 윤 평론가가 "월하(김월하 가곡 예능보유자) 선생님이 부르는 거는 시조목이야, 시조야. 그리고 조순자 선생님이 부르는 거는 가곡이야. 이런 이야기를 제가 사실은 그 이혜구 선생님이나 이런 분들한테서 좀…"하고 말하자 조 명인이 바로 이야기를 받는다.

1981년9월 1일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열린 국립국악원 제19회 무형문화재 정기공연에서 남창 홍원기와 함께 노래하는 여창 조순자 명인.(135쪽)/책갈무리
1981년9월 1일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열린 국립국악원 제19회 무형문화재 정기공연에서 남창 홍원기와 함께 노래하는 여창 조순자 명인.(135쪽)/책갈무리

"그 왜 그러냐면 목소리 자체가 여창은 그 은쟁반에 옥구슬이 (구르듯) 불러야 된다고 한 거거든. 근데 월하 선생님은 굵잖아. 선이 굵고 이제 경서도 소리를 하시는 분이니까. (…) 근데 내가 잘한다기보다 음 빛깔이 가곡에 맞는다는 거겠지." 그게 조 명인으로 하여금 가곡에 집착하게 했을까. "나는 가곡이 대단히 예술적이고 아름답고 최상의 곡이라고 얘기를 다들 하더라고. 나는 그게 인정이 안 되더라고…. 아니 이게 왜 아름다워? 항상 그거를 푸는 것이 일생의 내 숙제였어요."

책장을 넘기다 보면 윤 평론가의 감탄을 종종 발견하게 된다. 국악연구생 시절, 또는 국립국악원 초창기 이야기들 중에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들이 선명하게 설명되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얼기설기 기록되어 온 국악사의 빈틈을 메워주는 증언록이기도 하다. 그래서 의미가 크게 와닿기도 한다.

"이렇게 산 사람도 있구나. 후세 사람들이 이 책을 참고서 정도로라도 해서 읽어준다면 삶을 아무렇게나 살지는 않을 게 아닌가, 이 책에 제 삶이 100% 다 담긴 것은 아니지만, 제가 가곡만 한 건 아니잖아요. 그래도 나라에서 키워준 만큼 남겨놓고 가는 것이 제 소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정현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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