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철폐 독재타도 함께 외친 1979년 경상고 3학년 단짝 넷
죄책감에 시달리는 이창곤 씨 "옳은 일 인정 받을 때 위로"
항쟁 참가 숨겨온 김영환 씨, 정신과 치료 지자체 지원 요구

부마민주항쟁이 42주년을 맞았다. 항쟁은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이정표였음에도 오랫동안 사회적으로 기억되지 못하다가 조금씩 그 의미가 조명되고 있다. 2013년 부마민주항쟁 명예회복·보상 특별법이 만들어졌고, 2019년 국가기념일로 지정됐다. 최근 진상조사 기간을 연장하는 법 개정 논의도 이어진다. 이것으로 충분한 것일까. 잊힌 시간이 길었던 만큼, 참가자들이 견딘 울분과 트라우마는 현재진행형이다. 지난 13일 이창곤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이사와 김영환 부마민주항쟁경남동지회 부회장을 만나, 그동안 삼켜왔던 항쟁 참가 이후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잊을 수 없는 '그날' = 1979년 경상고등학교에 네 친구가 있었다. 활달한 성격이 맞아 단짝처럼 붙어다녔다. 3학년이었던 넷은 그해 시월, 예비고사·본고사 준비에 한창이었다. 넷의 인생을 뒤흔들어 놓을 현대사의 대사건에 휘말려들 줄은 꿈에도 모른 채.

영환은 10월 18일 창동에 책을 사러 갔다가 경찰과 대치 중인 시민들을 목격하고 시위에 합류했다. 그는 이날 창동에서 북마산역까지 투석전을 벌이다 무사히 몸을 뺐다. 이튿날 학교에서 셋에게 어젯밤 일을 털어놨고, 시위는 그날도 이어졌다. 하늘이 어둑해지자 "유신철폐-독재타도" 구호가 들렸다. 마침 이날 수업은 오전까지여서, 네 친구는 밖으로 향했다. 친구들은 북마산 일대에서 투석 시위를 계속하다, 저녁 늦게 영환의 성호동 자취방으로 몸을 숨겼다. "이 집이가 저 집이가?" 자취방 창문 너머 주변을 수색하는 경찰들 목소리가 들렸다. 넷은 달렸지만, 한 명이 붙잡혔다.

창곤은 북마산파출소로 잡혀가자마자 모진 고문을 받았다. 경찰은 손찌검, 발길질은 물론 볼펜을 손가락에, 경찰봉을 다리 사이에 끼워 고문을 가했다. 파출소 뒤 공터에 놓인 방화수통이 물고문에 이용됐다. 네댓 명이 허리와 다리를 잡고 거꾸로 물에 빠뜨렸다. 친구들 이름을 댈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4시간 동안 이어진 고문을 못 이긴 창곤은 자취방 주소를 댔다. 결국 친구들도 연행됐다. 이들에게 적용된 혐의는 무려 14개. 경찰관 폭행·공공기물 파손, 심지어는 북마산파출소장 납치 기도라는 터무니없는 혐의도 뒤집어썼다. 고문이 계속되자, 겨우 고등학생이던 4명은 뭐든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 이창곤(오른쪽) 부마항쟁기념사업회 이사와 김영환 부마민주항쟁경남동지회 부회장이 13일 오후 이 이사가 운영하는 카페에서 각자 안고 살아온 항쟁 트라우마와 인생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창우 기자
▲ 이창곤(오른쪽) 부마항쟁기념사업회 이사와 김영환 부마민주항쟁경남동지회 부회장이 13일 오후 이 이사가 운영하는 카페에서 각자 안고 살아온 항쟁 트라우마와 인생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창우 기자

◇끝나지 않는 트라우마 = 이창곤(60)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이사는 항쟁 참가자로 인정받아 배·보상을 받았지만 트라우마는 씻기지 않았다. 성호동 옛 철길을 따라 친구들이 모여 있을 자취방을 향해 걸어가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그는 "육체적인 아픔은 전혀 없었지만, 친구들 얼굴 보기가 너무 두려웠다"라며 "기차가 오면 뛰어들 마음으로 길을 걸었다"라고 회상했다. 고문현장 트라우마로 아직도 불을 끄고는 잠들지 못하지만, 잠드는 것 자체도 두렵다. 철길을 걷던 순간과 잡혀들어간 친구들의 비명이 꿈에서도 반복되어서다. 아직도 '띠리리링' 하는 옛 전화벨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고, 급작스레 울분이 터질 때도 있다. "니는 4시간을 당했지만, 난 10분도 못 버티고 네 이름 불렀을 거라." 친구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위로했지만, 그들이 그 일을 겪지 않고 풀어나갔을 삶을 생각하면서 자신을 옭아맸다.

조직 생활을 하지 못하고 지금껏 자영업에 종사해왔던 이유도, 국가가 휘두른 폭력 경험과 맞닿아 있다. 타인이 통제할 수 없는 '자신만의 공간' 안에서라야 비로소 조금이나마 안전한 느낌을 받을 수 있어서다.

이 이사에게는 친구들에게도 잘 꺼낼 수 없을 만큼 어려운 이야기였지만, 지난해 부마항쟁 영상콘텐츠 공모전을 진행하면서 트라우마에 맞설 용기를 냈다. 어린 학생들은 항쟁 참가 당시 이야기를 듣고 "우리의 영웅", "너무 수고 많으셨다"라고 말해줬다. 이 이사는 "그때 학생들 눈빛을 보면서 내가 해야 할 일을, 자랑스러운 일을 했다고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항쟁 참여자들이 원하는 예우는 위로금 얼마가 아니라, 자신이 정말 필요한 일을 했다는 사실을 인정받고 존중받는 느낌일 것"이라며 "민주주의 가치 계승을 통해 더 많은 관련자들이 정신적인 위로를 받았으면 한다"라고 말했다.

◇평생 숨겨야 했던 참가 사실 = '18일 시위에 참여했던 내가 친구들에게 그 일을 말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김영환(61) 부마민주항쟁경남동지회 부회장이 가끔 되새기는 질문이다. 네 친구 중 한 명은 그날 이후 자리를 잡지 못하고 술로 세월을 보내다 20대 초반에 숨을 거뒀고, 나머지 한 명은 경찰이 되어 철저히 과거를 숨겨야 했다. 이창곤 이사를 지켜보는 마음도 착잡하다.

김 부회장은 소방관으로 34년 근무하다 지난해 퇴직했다. 처음에는 다른 공부를 할 비용을 마련하려고 시작한 일이지만, 점점 다른 사람을 돕는 일에 매력을 느꼈다. 그는 "국가가 휘두른 부당한 폭력에 나도, 친구들도 당했지만, 공권력은 그런 일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불합리한 모습을 보면 윗사람이라도 참지 않았다. 유신정권에도 당당히 저항했다는 자긍심 때문이다. 그런 김 부회장도 재직하는 내내 부마항쟁을 입 밖에 꺼내지 않다가 '불이익은 절대 없다'라는 특별법 문구를 보고서야 관련자로 신고했다. 항쟁 참가 사실이 알려지면, 소방관으로 계속 일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두려움에서다.

고문 후유증은 그에게도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는 "근무하는 동안 별의별 참사, 끔찍한 광경을 자주 봤지만, 그날의 트라우마에 비할 수는 없다"라며 "폭력을 당한 사람이 폭력에 물들 듯, 흥분하면 통제할 수 없는 자신이 나올까 봐 두렵기도 하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신과 치료를 받거나 우울증 약을 복용할 때는 잠시 괜찮아져도, 약을 끊으면 다시 반복되니, 아마도 평생 안고 가야만 할 것 같다"라고 토로했다.

김 부회장은 "특별법상 공식 문서가 없어, 인우보증할 사람이 세상을 떠나 관련자로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도 아직 많다"라며 "도 조례와 시 조례는 이렇게 소외된 사람들을 보듬어 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광주에 국가 폭력을 치유하는 트라우마센터가 있는 것처럼, 경남도 역시 민주화운동 관련자들을 위한 정신과적 의료지원을 도립병원 등을 통해 해줬으면 한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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