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마지막 전투 펼친 노량
첨망대 올라 아득한 그날 가늠
일제 탄압 저항한 김정한 작가
남해서 민중 삶 생생하게 기록

남해를 다녀와야 한다고 했더니 남해가 고향인 곽 선생이 길잡이를 자청했다. 창비부산 이 대표와 우리 학교 이 선생님까지, 금요일 오후 이들과 동행하는 남해 가는 길은 물결처럼 넘실거렸다. 답사 길잡이를 곽 선생이 하니 먹고 노는 건 나머지 사람들의 몫이어야 했지만 이조차도 곽 선생이 흔쾌히 맡아 주었다. 역시 남해 사람은 배포가 크다.

남해도 배포가 크다. 남쪽 바다 전체를 섬 이름으로 삼았다. 남해보다 큰 섬들도 이름에 도(島)를 붙이는데 남해는 그조차도 안 붙인다. 남해고속도로에서 내려 섬진강대로로 갈아탔다. 이대로 노량대교를 건너 남해로 들어서면 되는데 굳이 노량대교 앞에서 옛길로 빠졌다. 옛 남해대교를 건너려는 것이다. 아저씨들이 나이든 다리에서 낭만을 찾으려는 게다. 교행하는 차량도 없이 한적하여 천천히 지나는데 노량의 물살만은 오래도록 급히 흐르고 있다.

◇노량, 내 죽었다는 말을 내지 말라!

정유재란 때이다. 왜군은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그해 12월 500여 척의 함선(300여 척이란 기록도 있다.)을 이끌고 노량으로 향했다. 충무공은 왜군의 진로를 예상했다. 관음포에 조선 수군을 매복게 하고 왜군을 기다렸다. 왜군의 배가 노량에 진입하자 매복하였던 조선군이 일제히 공격하였다. 살아돌아간 왜군의 함선은 불과 50여 척에 지나지 않았다.

노량의 물결은 사나웠다. 치솟는 물기둥의 허리를 바람이 베고 지나갔다. 적들은 바다를 뒤덮고 달려들었다. 검은 깃발의 선단이 서쪽 수평선을 넘어왔다. 물보라에 뒤덮여, 적선의 숫자는 헤아릴 수 없었다.

……

난간에 도열한 적들이, 일제히, 무더기로 쏘아댔다.

갑자기 왼쪽 가슴이 무거웠다. 나는 장대 바닥에 쓰러졌다.

……

지금 싸움이 한창이나. 너는 내 죽었다는 말을 내지 말라.

- 김훈 '칼의 노래' 중에서

충무공이 순국한 지 34년이 되는 1632년 지역의 선비들이 노량해전과 충무공을 기념하기 위해 사당을 세웠고 1662년에 나라에서 충렬사라는 이름을 내렸다. 아쉽게도 충렬사 문이 닫혀 있었다. 충렬사 옆에 선 아름드리 팽나무를 세 사람이 팔 벌려 안아 보았다. 이 정도 아름이 되려면 400여 년 전 노량의 치열했던 전투를 지켜보지 않았을까.

▲ 남해 노도에서 바라 본 금산. 노도는 김만중 선생이 3년간 유배생활을 한 곳이다. 선생은 이곳에서 생을 마감하기 전 <구운몽> <사씨남정기> 등을 남겼다.  /이헌수 시민기자
▲ 남해 노도에서 바라 본 금산. 노도는 김만중 선생이 3년간 유배생활을 한 곳이다. 선생은 이곳에서 생을 마감하기 전 <구운몽> <사씨남정기> 등을 남겼다. /이헌수 시민기자

충무공의 마지막 바다를 보러 관음포로 갔다. 첨망대(瞻望臺)에 올라 조선 수군이 매복했던 곳이며 충무공이 죽음을 맞은 바다 앞에 섰다. 바라보는 것만으로 부족한 바다여서 우러러볼 첨(瞻)을 누대 이름에 붙인 마음과 이 충무공이 죽은 바다를 보고 선 산이라 하여 이름조차 이락산(李落山)이라 한 마음을, 말하지 말라 하니 마음속으로 헤아려 볼 따름이다.

◇회나뭇골, 사람답게 사는 길을 걷다

남해 민중의 삶과 저항 이야기를 찾아 간 곳은 회나뭇골이다.

S읍에서 대티 쪽으로 빠지는 한길을 향해 선 효자문 뒤로 접어들면, 몇 발짝 못가서 자갈투성이인 골목 가에 커다란 회나무 한 그루 서 있다. 그래서 이 골목짜기를 회나무 골목이라 하고, 그 일대를 회나뭇골이라 부른다. 옛날식으로 부를 때는 그저 <서문 밖>이다.

-김정한 '회나뭇골 사람들' 중에서

김정한은 부산 동래 사람이다. 1932년 농민조합을 탄압하는 일본에 맞서 양산농민봉기가 일어났다. 이 일에 연루되어 유학 중이었던 김정한은 학업을 이어가지 못하고 남해공립보통학교로 오게 된다. 이곳에 근무하면서 들은 남해 사람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소설을 썼다.

<회나뭇골 사람들>은 일제강점기 백정 박선봉 노인 가족이 겪은 이야기이다. 삼일운동이 일어났을 때 박선봉의 큰아들 선부는 투석전을 벌이며 만세운동에 앞장서다가 일본 경찰의 총질에 죽는다. 작은 아들은 고문으로 바보가 되고, 박선봉의 부인은 망측한 고문을 당하고, 박선봉은 자신의 성기를 자르며 분노한다. 손자 명달은 신사가 있는 산에서 버찌를 주워먹었다는 이유로 벚나무에 동여매인다.

김정한은 이 땅의 꽃이름 하나조차 놓치려 하지 않은 리얼리스트답게 그가 형상화한 소설 공간은 매우 사실적이다. <서문 밖>이라 한 곳은 서변리 일대이다. '효자문'이라 한 곳은 '김백렬 영모문'이다.

산이라면 내 건너 일본 사람들의 신사가 있는 산을 말한다. 물론 옛날 그 고장 사람들의 당산이 있던 곳이다.

-김정한 '회나뭇골 사람들' 중에서

소설 속 '내'는 옛적 남해읍성 서쪽 마을이었던 회나뭇골을 관통하는 봉천이다. 남해공설운동장 앞을 흐르는 봉천 구간은 복개되어 주차장으로 쓰이고 있다. '산'은 조선 시대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당이 있던 남산이다. 일본인들이 제당을 허물고 그들의 신사를 세웠다. 소설 속 회나무와 만세를 부르며 투석했다는 자갈밭은 없어졌지만 <회나뭇골 사람들>의 발길을 따라 걸으며 '사람답게 살아라'라고 일갈하던 요산 김정한 선생을 생각했다.

◇노도, 글자가 되기 전에 흥건해지는 그리움

남해 유배객이었던 자암 김구가 '한 점 신선의 섬, 일점선도(一點仙島)'라고 한 남해에서도 노도는 또 특별하다. 백련에서 배를 타고 노도까지는 10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섬에서 섬으로 서포 김만중을 만나러 갔다.

김만중의 아버지 김익겸은 병자호란 때 척화론을 주창하며 강화도에서 자결한 인물이다. 유복자로 태어난 김만중은 어머니의 지극한 보살핌 아래에서 자랐다. 가난한 살림에도 책값을 아끼지 않았고, 책을 빌려 필사하여 아들에게 읽혔다. 김만중은 29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갔다.

▲ 노도 김만중문학관 전경.  /이헌수 시민기자
▲ 노도 김만중문학관 전경. /이헌수 시민기자

정치는 예나 지금이나 꽃길은 없는 듯싶다. 김만중이 정치를 하며 꽃길만 걷겠다는 순정한 발상을 하진 않았겠지만 유배와 해배를 거듭하다 유배에서 생을 마감하리라 짐작이나 했겠나. 강원도 고성에서 3개월 유배를 시작으로 평안도 선천을 거쳐 남해 노도 3년 간의 유배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지극한 효자로 소문이 자자했다. 어머니가 즐거워하시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했다. 선천에 유배 중일 때 어머니의 적적함과 근심을 덜어 드리기 위해 <구운몽>을 짓기 시작했다고 한다. 유학자이면서도 불교의 사상을 바탕으로 삼은 소설에 버젓이 자신의 이름을 밝혀 적을 수 있었던 건 어머니를 향한 효심 때문이 아니었을까 막연한 짐작을 해 본다.

김만중은 노도에 머물면서 많은 글을 썼다. 그중 <사씨남정기>는 그의 생애에서 보아도 노도에 유배된 처지를 보아도 특별했다.

난 <사씨남정기>를 장옥정과 그 패거리의 악행을 세상에 널리 알리기 위해 지었네. 소설이 무기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네.

-김탁환 '서러워라, 잊혀진다는 것은' 중에서

소설가 김탁환은 김만중과 <사씨남정기>를 추리역사소설로 엮으며 김만중의 마음을 이렇게 적었다. 무기일 수도 있는 글로 김만중은 서사 문학을 택했다고 김탁환은 짐작했다.

김만중에게 소설이 무기였다면 시는 그리움이었다. 그의 그리움에는 항상 어머니 윤 씨가 있다.

오늘 아침 어머니 그립다는 말 쓰자고 하니

글자도 되기 전에 눈물 이미 흥건하다.

몇 번이나 붓을 적셨다가 도로 던져 버렸던가

문집에서 남해시는 반드시 빼버려야 하리.

-김만중, '사친(思親)'

노도의 김만중문학관을 돌아보며 네 명의 아저씨들은 감탄했다. 김만중과 작품의 전시와 조선 후기 문학의 흐름까지 교육과 재미를 다 갖췄다. 심지어 재치도 있다. 문학관 남녀 화장실 표시는 성진과 팔선녀로 돼 있다. '참된 성품의 성진(性眞)보다 놀 줄 아는 양소유(小遊)의 화장실을 가고 싶어'라며 너스레를 떨어 본다.

남해를 보물섬이라 부른다 한다. 보물은 발견하는 즐거움이 있다. 문학이란 보물지도를 들고 나선 남해 보물찾기는 일요일 오후 같았다. 시간은 순삭하고 몸은 되돌아 보게 한다. 남해 사람 말로 한마디 남겨 본다.

"남해로 오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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