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살에 신문배달 마치고 합류
경찰서 끌려가 폭행 후 풀려나
김주열 소식 듣고 다시 거리로

"두고두고 후회하는 게 그날 아무 집이나 들어가 좀 재워달라고 해야 했는데 그러지를 못했다는 겁니다. 시위하다가 길을 잃었다고 말하면 받아줬을 텐데….  기어코 집에 가겠다 나섰다가 오동동 다리 앞에서 매복해 있던 경찰에게 붙잡혔죠. 그러고는 종일 맞은 기억 뿐입니다."

신문배달원으로 1960년 3.15의거에 참여했던 서행남(80·창원시 마산합포구) 씨 기억 중 일부다. 서 씨가 의거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알고 진실규명 신청을 도운 김주열열사기념사업회는 학생이나 단체 참여자가 아닌 개인의 기억이라는 점이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고 강조했다.

16일 창원시 마산합포구 오동동 문화광장에서 서 씨를 만나 잊지 못할 그날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서 씨는 당시 19살이었다. 마산중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입학금이 없어 고등학교는 진학은 포기했다. 일거리를 찾던 중 신문배달원 제의를 받고 민주신보를 배달하던 때였다. 

김주열열사기념사업회가 진실규명을 신청한 다섯 명 중 유일한 생존자 서행남 씨가 창원시 마산합포구 오동동 문화광장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황선민 인턴기자

3월 15일 오후 집에 머물던 서 씨는 시끄러운 함성에 밖으로 나왔다. 그의 집은 창원시 마산합포구 오동동에 있는 옛 민주당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자연스레 부정선거 규탄 시위 행렬에 합류한 그는 옛 민주당사 인근 시내를 한 바퀴 돌았다.

"투표에 불만 있던 사람이 많았다. 기표소에 반공청년단으로 보이는 이들이 같이 들어가 대신 투표하기도 했다. 당시 할머니께서도 투표소에 갔다 한바탕 하고 왔다는 걸 듣고 어딘가 문제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시위 주동자와 민주당 사람들이 경찰에 잡혀가자 시위대는 잠시 해산했고, 서 씨도 일행들과 저녁에 만나기로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해질 무렵 다시 옛 민주당사 앞으로 모인 서 씨와 시위대는 개표를 저지하고자 옛 마산시청(현 마산합포구청)으로 향했다. 3.15의거기념탑을 거쳐 무학초등학교까지 나아간 시위대는 옛 도립마산병원(현 마산의료원) 인근에서 멈췄다. 시위대가 시청 방향으로 나아가려고 하자 반대편 무리가 자동차 라이트를 비추며 이를 저지했다. 이내 '탕탕탕' 총소리가 들렸다. 

"그게 최루탄인지 몰랐다. 총소리인 줄 알고 도립마산병원 뒤쪽으로 도망쳤다. 산복도로를 따라 내려오니 무학초등학교 쪽에 진을 친 사람들과 만났다. 이때 중학교 후배 김용실이 총에 맞아 죽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보통 일이 아니구나 싶었다."

이후 무학초등학교도 경찰에 둘러싸이자 서 씨가 속한 시위대는 뒷문을 통해 수도산(추산근린공원 인근)으로 올라가 용마산까지 이동했다. 산에서 내려온 그는 집으로 돌아가려고 산호동에서 오동동으로 이어지는 돌다리를 건넜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경찰과 마주쳤다. 

"캄캄해서 아무것도 안 보였는데 갑자기 경찰 한 무리가 나타나더니 총을 들이밀며 '손 들어'라고 말했다. 그대로 수갑 차고 오동동 파출소로 끌려갔다. 파출소 가니 내 또래 젊은 사람이 많았다. 경찰과 반공청년단이 붙잡혀 온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두들겨 팼다."

파출소에서 마산경찰서로 넘겨진 서 씨는 다시는 시위 안 하겠다는 서약서를 쓰고서야 풀려났다. 15일 저녁에 시위한다고 집을 나섰던 그는 16일 저녁 무렵에야 돌아올 수 있었다. 이후 4월 11일 최루탄이 얼굴에 박힌 김주열 열사 시신이 발견되자 마산은 또 한 번 들끓게 된다. 서 씨 역시 거리로 나가 저항했다.

1960년 3월 파출소에서 마산경찰서로 넘겨진 서행남 씨는 다시는 시위 안 하겠다는 서약서를 쓰고서야 풀려났다. /황선민 인턴 기자

"그때는 너나 할 것 없이 시위에 참여했다. 무서운 것보다 오로지 잘못된 것을 바꿔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3.15의거와 이후 시위에 참여했던 걸 후회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김영만 김주열열사기념사업회 상임고문은 "그동안 학생들이 참여했던 기록은 많이 발견됐고 여전히 활발하게 밝혀지고 있다"면서 "하지만 그에 비해 노동자들이 개인이 참여했던 기록은 부족하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아무래도 동창회나 조직이 남아 있는 학생 참여자와 달리 개인은 정보도 부족하고 진실규명 신청을 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며 "이런 사람들 기억도 잘 정리해야 파편화된 3.15의거를 온전하게 기록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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