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클래식 이야기 - 〈스탈린이 죽었다! 〉(2017)

▲ 영화 <스탈린이 죽었다!> 스틸컷.

예술만큼 다양성과 창작, 표현, 그리고 그 해석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는 분야가 또 있을까? 하지만 그 해석의 자유, 소위 '내 맘대로 해석'으로 인해 권력자들에 의해 오용, 곡해되기도 한다. 1932년, 옛 소련연방 예술가 협회는 이를 넘어 창작의 자유에 족쇄를 건다. '사회주의 리얼리즘', 그들이 내건 창작의 기본 원칙에는 생활 진실성, 사상성, 그리고 인민성의 원리가 있다.

하지만 한계가 명확하다. 이 또한 역설적이게도 해석의 자유로 인해서다. 예술 창작물로부터 발현된 사회주의 리얼리즘적 요소의 유무를 누가 평가한단 말인가? 이는 곧 예술계에 피바람을 몰고 온다. 대놓고 목적의식적이거나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반한다면 억울할 일은 없다. 하지만 예술이란 은유의 마술이다. 그 은유가 원리에 반한다 찍히는 순간 끝이며 이를 좌우하는 자가 예술인이 아니라 권력가다. 모두가 이러한 권력의 눈치를 보며, 시대를 표현해야 할 예술가마저도 숨죽인 시절, 이 모든 사건의 중심에 스탈린이 있다. 레닌 이후 소련의 최고 권력자로 냉철한 지성과 강인한 신념을 소유한 혁명가, 하지만 목적의 달성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냉혹한 독재자. 그런 그가 죽었다.

 

스탈린 지시로 녹음된 음반
'비판 편지'몰래 넣어 전달
내용 읽은 독재자 급사 설정

◇짤막한 편지 = 영화는 너무도 아름다운 선율로 시작된다. 여기는 콘서트장, 총명한 기운의 피아니스트가 빚어내는 선율에 모두가 빠져든 듯하다. 이때 걸려온 한 통의 전화, 지금 방송되고 있는 연주의 녹음본을 가져오란 것이다. 스태프는 경우를 따지지도 못한 채 그저 '예'라고 대답한다. 전화를 건 주인공이 바로 최고 지도자 '스탈린'이기 때문이다. 숙청에 마땅한 이유가 필요치 않던 시절이니 만약 '아니요'라고 대답했다면 그 결과는 뻔하다. 하지만 문제는 녹음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연주회가 끝나버리고 말았다는 것. 목숨이 달린 일이니 돌아가려는 관객과 연주자를 급하게 붙잡아 어르고 달래 다시 연주가 시작되고 이번엔 확실히 레코드에 담아야 한다. 좌충우돌 끝에 전달된 녹음, 측근들과 함께 저녁 시간을 보낸 스탈린은 받아 든 음반을 꺼낸다. 그리고 그 속에 함께 담겨 온 피아니스트의 짤막한 편지. 내용인즉 비난을 넘어 비웃음이 가득하다.

"도움에 감사합니다. 당신을 위해 항상 기도하고 신께서 국민과 국가에 지은 당신의 엄청난 죄를 용서하시길 빌겠습니다. 자비로우신 신은 당신을 용서하실 겁니다."

충격을 받은 것일까, 이를 읽은 스탈린은 황당함에 킬킬대다 이내 숨이 급해지며 그 자리에 쓰러져 버리고 만다. 아침이 되어서야 발견된 스탈린, 이미 가망이 없는 상태다. 하나둘 모여드는 측근들, 스탈린의 충복으로 온갖 악행의 선두에 섰던 베리야, 원치 않는 장례위원장 역할을 수행하게 된 흐루쇼프, 부서기장으로서 서기장의 권한을 대행해야 하는 말렌코프, 그리고 분위기 파악이 느리고 곧 숙청될 위기에 있던 몰로토프. 뒤늦게 의사들을 불러 모으려 하지만 쓸만한 이들은 이미 차가운 시베리아에 있거나 목숨을 잃은 상태다. 그렇게 최고 권력자를 잃었다. 그것도 갑자기. (그렇다면 작곡가 '프로코피예프'도 몇 시간 전 세상을 떠났겠지) 측근들은 멘붕에 빠져 우왕좌왕, 하지만 이런 중에도 주인 잃은 권력을 취하려는 그들만의 눈치 싸움이 시작된다. 먼저 앞서는 자는 베리야, 하지만 이에 위기감을 느낀 흐루쇼프는 반전의 기회를 엿본다. 그렇게 맞이한 장례식 날. 새로운 권력의 중심이 정해질 것이다. 여우 같은 처세의 베리야, 불리한 상황에 반전의 키를 마련한 흐루쇼프. 누가 과연 스탈린의 뒤를 이어 권력을 움켜쥐었을까?

 

▲ 영화 <스탈린이 죽었다!> 스틸컷.
▲ 영화 <스탈린이 죽었다!> 스틸컷.

◇피아니스트 = 영화의 시작, 방송국의 스태프를 위기로 몰고 갔던 음악이 있다. 대체 어떤 곡이며 누구의 연주였길래 독재자의 마음을 흔들었을까? 영롱한 타건 속에 묻어 있는 흐느낌. 바로 '모차르트'(W. A. Mozart)의 23번째 피아노협주곡(Piano Concerto No.23 in A major, K.488)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 곡의2악장이며 이때 하늘의 소리를 내어주던 이는 바로 옛 소련의 전설적인 여류 피아니스트 '마리아 유디나' (Maria Yudina·1899.09 ~ 1970.11).

"1944년 어느 날, 라디오를 듣던 스탈린은 방송국에 전화를 걸어 전날 유디나가 연주한 모차르트의 음반이 있는지 묻는다. 겁에 질린 관계자는 어쩔 수 없이 예라고 대답한 후 유디나와 혼이 나가버린 지휘자, 그리고 오케스트라를 다시 불러 녹음을 완성한다. 지휘자를 세 번이나 갈아치운 후의 일이며 세상에 단 한 장만이 존재하는 음반인 것이다.

이후 유디나는 2만 루블이 담긴 봉투를 받아 든다. 스탈린의 특별사례금이다. 이에 그녀는 이 돈은 모두 교회에 기부하겠다는 내용과 함께 (스탈린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는 설정은 영화 상 그럴 뿐이다. 스탈린의 사망 연도는 1953년이다) 자살과도 같은 편지를 보낸다. 이를 읽은 스탈린의 반응은 어땠을까? 놀랍게도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옆으로 치워두었으며 불쾌한 표정조차 짓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스탈린이 자신의 다차(별장)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되던 날, 그의 턴테이블에 올려져 있던 음반은 유디나가 연주한 모차르트의 음반이었다."

 

▲ 영화 <스탈린이 죽었다!> 스틸컷.

◇저항 음악가 = 영화에도 사용된 이 일화는 솔로몬 볼코프의 베스트셀러 <증언>(Testimony)을 바탕으로 한다. 1975년 사망한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회고록을 엮은 책이다. 그렇다면 실제 있었던 일이란 말인가? 말 그대로 영화 같은 이 일화는 증명을 넘어 사실일 가능성이 희박하다. 일단 스탈린 기록보관소를 비롯한 그 어디에도 그런 레코드가 남아있지 않으며 쇼스타코비치가 스탈린에 얽힌 이야기를 지어내기를 즐겼다는 사실을 상기해 본다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이 정도의 일화라면 두 가지는 분명하다. 스탈린이 유디나의 음악을 편파적으로 좋아했다는 것, 그리고 그녀의 품성이 범상치 않다는 것이다. 1899년 러시아의 레벨에서 태어난 유디나, 천재로서의 삶을 시작했지만 일생이 평탄치는 않았다. 피아니스트임에도 평생에 변변한 자신의 피아노를 소유한 적조차 없었다고 하니 이는 그녀의 품성에 기인한 것이다. 진중하고 조숙한 데다 부와 명예를 좇지 않았으며 옳다고 믿는 일에 대한 행동에 거리낌이 없었다.

러시아 혁명으로 황제가 몰락한 1917년에는 이를 기뻐하며 노동자 계급의 아이들을 위해 헌신한다. 1919년에는 러시아 정교회에 귀의(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상당히 반하는 행동이었다)하며 종교적 신념이 더해져 탄압받던 성직자들을 돕는다. 이러한 그녀가 스탈린의 폭압과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예술적 굴레를 마주하였으니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한마디로 유디나는 어떠한 억압정책에도 꿋꿋이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투사형 음악가였다. 그녀는 탄압받는 동료 예술가들을 변호하기에 주저치 않았으며 여기엔 함께 수학한 동문이자 당대를 대표하던 작곡가 쇼스타코비치가 포함되어 있다.

 

모차르트 피아노협주곡 23번
여성 피아니스트 유디나 연주
당시 폭압·억압정책에 항거
소신대로 행동 '투사형 음악가'

당시 소련 최고의 작곡가로 추앙받았지만 늘 비판의 중심에 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던 이가 쇼스타코비치다.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연주회에서는 활동 제약으로 책을 내지 못하던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시를 앙코르 대신 읽어 5년 동안이나 공연이 금지되기도 한다. 이러한 저항은 편안한 삶의 기반이 되어 줄 음악원 교수직을 내어놓도록 하였으며, 명성과 인기에 비해 빈약한 연주회와 레코딩의 원인을 제공한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굴하지 않았다. 이는 피아니스트로서의 삶뿐만 아니라 삶 그 자체를 건 항거로, 그녀의 연주를 듣다 보면 지닌 품성이 뿜어 나오는 듯 강건하다.

'깊은 바다에 빠진들 그녀에게는 무릎 깊이밖에는 되지 않으니 겁낼 일이 없지.' (솔로몬 볼코프 <증언>).

/심광도 시민기자(뮤직 파라디소 대표)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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