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공단의 기억 (7) 창원대로에 얽힌 이야기

정부, 건설 자재 이동·산업도로 목적
개발구역 고시 직후 창원대로 착공

평화롭게 살던 농민들의 땅에 어느 순간 표시목이 박혔다. 처음에는 논밭이었고 그 다음에는 집이었다. 마을 사람들을 그러모아 관청에서 대거리를 해도 부질없었다. 며칠 갇혀 있다 보면 버틸 재간 없이 수용동의서에 도장을 찍었다. 말뚝이 박힌 곳마다 어김없이 중장비가 들이닥쳤다. 대대로 부쳐 먹던 논마지기든 선조가 잠든 선영(先塋)이든 가리지 않았다. 농민들이 잃은 땅은 삶 그 자체였다. 이들이 고향을 등지고 이주단지로 떠나면서 겪은 고통은 눈부신 도시 발전의 그림자로 남았다.

"딱 우리 집 복판에 말뚝을 박더니…. 왜 그러는지 자세히 가르쳐주지도 않아요. 너희는 알 필요 없다고…. 제일 좋은 논도 평당 1300원, 밭은 200~300원. 그냥 강제수용이에요." 삼동리 출신 명희찬(65) 씨가 기억하는 고등학교 2학년 늦봄의 기억이다. 

1978년 9월 웅남동 원주민들이 철거 인력들에게 저항하고 있다. /양해광 창원향토자료전시관 관장
1978년 9월 웅남동 원주민들이 철거 인력들에게 저항하고 있다. /양해광 창원향토자료전시관 관장

1974년 정부는 두대동·덕정동·삼동동·반송동·연덕동·용지동·목동·토월동·외동·정동·가음정동·남산동 전역과 서상동 외 27개 동 일부 지역을 산업기지개발구역으로 지정·고시했다. 창원종합기계공업기지(현 창원국가산단) 조성을 위한 행정 지원 편의 차원에서 창원군이 마산시로 편입된 이듬해였다. 정부는 고시가 떨어지자마자 가장 먼저 도로 건설에 착수했다. 일단 자재 수송 차량이 드나들 길이 필요했고 궁극적인 목표는 배후도시와 공단지역을 가로지를 '기지대로'(현 창원대로)를 만드는 일이었다. 

기지대로는 공단도시 창원의 젖줄인 동시에 원주민들의 삶을 가르는 낫이었다. 도로 조성을 위해 사화마을(운암서원 인근), 평산마을(당시 39사단 왼쪽), 죽전마을(현 팔룡동 제9 탄약창 인근), 삼동마을(지금의 삼동공원), 목리(현 LG전자 창원2공장), 가음정리 본동(기업사랑공원 맞은편 주택단지) 등 여러 마을 논밭과 일부 집터를 수용해야 했다. 이 지역 중 삼동마을, 가음정리 등 일부 마을은 공단 조성 초기인 1970년대 초반에 논밭이 먼저 수용됐고, 마을은 1990년대 이후에 철거됐다. 동네는 그대로인데 생계 수단만 빼앗긴 셈이다. 가음정리 출신 강장순(60) 씨는 "농경 생활만 하다 갑자기 환경이 바뀌자 어른들은 그야말로 공황상태에 빠졌다"라고 회상했다.

1984년 2월 기지대로 확장공사가 진행되는 모습. /양해광 창원향토자료전시관 관장
1984년 2월 기지대로 확장공사가 진행되는 모습. /양해광 창원향토자료전시관 관장

 

사화·평산·죽전·삼동·가음정리 등
도로용지 안팎 마을·농지 헐값 수용

 

◇땅을 생명으로 알던 사람들 = 원주민들의 반발은 당연했다. 명 씨는 "'논밭을 앗아가면 우린 뭐 먹고사노' 부모님들이 읊조리는 모습을 보고 혈기 왕성한 자식들은 '못 나간다' 외치며 시위했다"라고 말했다. 시위는 오래가지 못했다. 많아 봐야 10명쯤 되는 젊은이들이었고 경찰에 끌려가 며칠 밥을 굶기니 자연히 움츠러들었다. 그는 "옆방에서는 사람 신음을 녹음한 테이프를 틀어두면서 겁을 주더라"라며 "앞으로 시위 안 하겠다고 다짐하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라고 말했다.

다른 마을도 상황은 비슷했다. 웅남면사무소 소재지 창곡마을은 전체 1200가구 정도 됐는데 시위가 격렬한 편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매일 북이나 꽹과리를 치며 광장에 나왔다. 이들도 모두 경찰서 유치장에 갇히는 신세였다. 이곳 출신 이성주(75) 씨 논밭 역시 도로 터에 걸쳤다. 그는 "당시 시위 주도자가 직접 현장에 나오지 않다 보니 행동대원들만 잡혀갔다"라며 "부모들은 주도자에게 몰려가 '큰소리만 치지 말고 어떻게든 내 자식을 꺼내와라'고 항의했었다"라고 떠올렸다. 그러면서 "결국 주도자가 경찰에게 '절대 시위하지 않겠다'는 합의서를 쓰고 나서야 풀려나왔다"라고 덧붙였다. 강장순 씨는 "어차피 당시 산업기지개발촉진법상으로는 국가가 수용하고자 하면 저항하기 어렵다"라며 "게다가 주거지를 철거하려면 사람부터 빼내야 하지만, 논밭은 그냥 밀면 끝"이라고 말했다.

1984년 2월 기지대로 확장공사가 진행되는 모습. /양해광 창원향토자료전시관 관장
1984년 2월 기지대로 확장공사가 진행되는 모습. /양해광 창원향토자료전시관 관장

당시 창원면사무소에 근무하던 최삼도(88) 씨는 팔룡동에 도로가 깔리기 시작하던 때를 회상했다. "원주민들에게는 땅이 생명이니까 평산·죽전·사화 마을 사람들이 매일 공사장에 와서 시위했다"라며 "불도저 앞을 몸으로 가로막거나 똥오줌을 뿌리는 일은 예사"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시받으면 출근하자마자 시위 막으러 가서 점심도 거르고 했다"라며 "사정사정해도 물러서지 않으면 경찰을 부를 수밖에 없었고 당시에는 신경쇠약에 걸릴 정도였다"라고 덧붙였다.

정작 최 씨도 1955년 39사단(현 창원유니시티)이 경기도 포천에서 옮겨올 때 토지수용을 당한 피해자다. 그 자신이 항의하다 보안대에 끌려간 적이 있었음에도 창원공단 조성 당시에는 주민들을 설득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 것이다. 

 

농사 전부로 알던 원주민 삶은 '공황'
산업기지개발촉진법 저항 여지 안 둬
폭력·회유 앞에 속수무책 처분 '도장'

 

◇국가시책이라니 물러나 = "여기 어디 차가 다니노? 이 도둑놈들아! 운동장같이 만들어서 뭐 할라 그라노!" 당시 원주민들이 시위를 막으러 나온 공무원들에게 자주 외치던 이야기였다.

기지대로는 1977년에 왕복 2차로 형태로 임시 개통했는데 10년 동안 차츰 폭을 넓혀 왕복 8차로가 됐다. 지금은 창원의 자랑이지만 당시에는 차량 통행이 잦지 않았다. 도로 옆 보도블록에도 풀만 무성했다. 원주민들이 자꾸만 도로를 확장하려는 시도를 이해하기 어려웠던 까닭이다.

1978년 9월 삼동마을 앞 왕복 4차로 기지대로에 차량이 지나가고 있다. /양해광 창원향토자료전시관 관장
삼동마을 앞 왕복 4차로 기지대로에 차량이 지나가고 있다. /양해광 창원향토자료전시관 관장

당시 경상남도 창원출장소에 근무했던 이광수(73) 소설가는 "당시 공무원들은 '여기 방산업체가 많이 들어오기 때문에 나중에 전쟁 터지면 비행기 활주로로 쓸 것'이라고 주민들을 달랬다"라며 "그 말을 듣고 국가 시책이라면 어쩔 수 없다며 물러서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라고 회상했다. 이 이야기는 창원시 원주민들이 공통으로 떠올리는 기억이다. 나랏일에 방해가 되면 안 된다는 순박한 생각이었고, 공장이 들어서면 일자리가 많이 생길 거라는 희망도 있었다.

공무원들이 으레 핑곗거리로 꺼냈던 활주로 계획은 실제로 존재했다. 윤재필(72) 시인은 "1976년 1월 창원시 도시계획·실시설계를 맡았던 대지종합기술공사 직원으로 처음 창원에 왔다"라며 "당시 내부적으로는 기지대로를 활주로로 활용하겠다는 계획도 세우고 있었다"라고 증언했다. 윤 씨는 "무기 생산 공장을 유치하려니 유사시에 비행기가 뜨고 내릴 필요가 있었던 것"이라며 "당시 왕복 8차로면 한국에서 가장 넓은 도로였기 때문에 최적의 조건이었다"라고 설명했다. 39사단 뒤 사화비행장, 김해공항 등 대안이 있자 활주로 이용 계획은 취소됐고 이후에는 이곳에 지하도로가 생겼다.

버스가 겨우 다니는 좁은 신작로만 알던 원주민들에게 끝도 없이 뻗은 기지대로 모습은 생소했다. 천영훈(61) 극단 미소 대표는 "동정동 창원중학교에서 오전 수업을 끝냈는데 버스비로 빵을 사 먹어 버리곤 창원역부터 무작정 대로를 걸었다"라며 "직선 길이니까 연덕동 집까지 얼마 안 걸릴 줄 알았는데 중학생 걸음으로 집에 도착하니 벌써 어둑어둑하더라"라고 회상했다. 

/이창우 강찬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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