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전통 순장바둑 일제에 퇴색
고유 방식으로 치르는 대회 필요

"역사는 기록이다. 기록의 보존이다. 그게 문화다."

고 이광구 바둑평론가가 2008년 <일요신문>에 경남 함양 출신 노사초 국수의 생가와 사적비를 취재하여 말미에 남긴 글귀다. 노사초 국수는 조선 말부터 대일항전기를 거쳐 광복 무렵까지 바둑활동을 했던 인물이다.

옛날 옛적부터 대일항전기까지 우리 바둑은 순장바둑의 시대였다. 순장바둑은 흑백 각기 8개의 치석을 놓고 시작하기에 포석단계는 없지만 치열한 수 읽기를 바탕으로 승부를 겨루는 묘미가 있는 바둑이다. 한국바둑이 실전적이라는 평을 받는 까닭도 이러한 순장바둑의 유전자가 바탕이 되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노사초 국수의 기풍은 전투형으로 사석작전과 바꿔치기에 능통했다. 그의 별칭 노상패(盧上覇)에서 알 수 있듯이 패싸움도 능수능란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노사초 국수가 바둑에만 능통했던 것이 아니었다. 약관의 나이로 진사시험에 합격했지만 일제로부터 나라를 잃자 대과에 응시하지 않았다. 노사초 국수는 부친의 가산을 정리해 국난 극복 자금으로 헌납하고 나라 잃은 설움을 조선팔도 바둑 유랑하는 것으로 달래었다. 당시는 일제가 조선의 농업, 상업, 역사, 문화 등을 움켜쥐고 좌지우지할 때였다.

순장바둑도 예외는 아니었다. 수천 년의 역사를 지닌 순장바둑도 일본바둑에 의해 점령당했던 것이다. 우리 역사가 일제의 칼날에 조각조각 베어지고 불태워진 것처럼 순장바둑의 고수들은 직업적으로 수백 년간 기술을 발전시킨 일본 프로기사들에게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순장바둑 고수들에게 바둑은 대개 선비가 갖추어야 할 고아한 취미 중 하나였다. 그에 반해 일본은 도쿠가와 막부 이후, 바둑의 4개 가문이 목숨을 건 쟁기(爭棋)를 벌여 다양한 이론과 기술을 발전시킨 상태였다. 마치 일본이 148년간의 전국시대에 습득한 전쟁 기술들을 조선침략에 썼던 것처럼 선비 출신의 순장바둑 고수들은 일본 프로기사들의 기술을 당해낼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 순장바둑도 취미가 아니라 직업적으로 연구하고 발전시켰다면 어땠을까. 우리 민족이 열국시대, 삼국시대의 쟁투기를 거쳐 당시 우리보다 미개했던 일본열도에 진출하진 않았을까.

광복 후, 우리 역사는 일제가 조작해 놓은 이론을 추종 또는 변형해야만 석·박사 학위 받기가 유리했다. 그리고 일본 극우의 장학금으로 일본유학을 다녀온 많은 이들이 대학 사학과 교수로 임용되었다. 과목을 개설해 독립운동 역사가들의 사상과 이론을 가르치는 우리나라 대학 사학과가 적은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비판의 학문인 역사학이 시민들로부터 비판을 받는 이유 중 하나다.

식민사학을 실증사학으로 개칭했다면 현재의 바둑도 일본바둑을 현대바둑으로 개칭해 사용하고 있다. 민족정서상 차마 일본바둑이라고 할 수 없던 것이다. 그래서 일반인들은 지금의 바둑이 본래 전통바둑인 것처럼 알고 있다.

중국이 자신들이 여는 세계대회에 중국규칙을 적용하는 것처럼 우리는 왜 그러지 못할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인공지능이 프로를 이기는 마당에 계가법만이라도 우리 순장바둑 방식으로 하는 바둑대회를 개최하면 어떨까 한다. 전통과 명분을 중시하는 분들이 뜻을 모으면 충분히 가능하리라 본다.

바둑문화는 보존이다. 보존을 하려면 기록을 해야 한다. 그리고 이 기록이 역사가 된다.

/조용성 경남바둑협회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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